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며칠 전에 의정부에 있는 부모님을 방문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잠시 병원엘 가셨기 때문에 모처럼 집에 있던 앨범을 보았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결혼사진도 보았고, 저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아버님 사진도 보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저의 학생 시절의 사진들도 보관하고 계셨습니다. 중학생 때, 고등학생 때, 신학생 때, 군에서 찍은 사진까지 보았습니다. ‘아 옛날이여!’라고 할 정도로 오랜 사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 사진 속 어린 시절의 친구도 있고, 조금씩 얼굴이며, 추억들이 생각나는 사진들도 있었습니다.
40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같은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이름도 변함이 없고, 혈액형도 같고, 부모님과 형제들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40년 전과 다른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생각의 폭과 삶의 태도가 많이 변했습니다. 키도 자랐고, 몸무게도 변했습니다. 그때는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누군가를 도우면서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컴퓨터의 기억을 지우고, 다른 기억을 넣는다면 컴퓨터는 같은 컴퓨터이지만 다른 컴퓨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능과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통해서 살아있으면서 가장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비’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나비는 땅위를 기어 다니면서 풀잎을 먹고 살아갑니다. 어느 정도 자란 나비는 번데기가 되어 변태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오랜 시간 꼼짝없이 꼬치가 되어 갇혀있던 애벌레는 드디어 화사한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땅위를 기어 다니던 애벌레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는 우리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하지만 나비의 시작은 애벌레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활이후의 삶에 대해서 질문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마치 땅 위를 기어 다니던 애벌레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같은 것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생명의 연속성에서는 같은 면이 있지만, 그 기능과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후의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 갈 것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의 상식과 기준으로 부활이후의 삶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삶이 또한 부활이후의 삶에도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서다. 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십자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분노와 원망을 던져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