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 특강 2

2009. 11. 11. 오전 8:39:11

글자

 

키에르케고르는 간결하고 짧은 소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의 임금이 백성들을 무척 사랑해서 가끔씩 평복을 하고, 궁궐을 나와 백성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가난한 농부의 딸을 보았습니다. 농부의 딸을 사랑하게 된 왕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왕의 복장으로 딸에게 사랑을 고백하면 가난한 농부의 딸은 진심으로 사랑을 받아 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결국 왕은 왕의 직위를 포기하고 평민이 되어 딸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왕에게 충언을 하였습니다. 만일 평민이 되어 가난한 처지가 된 왕을 농부의 딸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랑도 잃고, 왕의 지위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왕은 신하들의 충언도 듣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농부의 딸에게 가서 사랑을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키에르케고르는 그 결말을 정하지 않고 소설을 끝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주 가난한 아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와서 사랑을 고백하십니다. 우리는 가난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세상의 것들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아무것도 주지 않는 ‘성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한없는 사랑, 그분의 기적, 그분의 말씀을 통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주지 않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그로인해 커다란 힘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손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귀는 슬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신 예수님의 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모든 사람들을 뜨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최초의 감실이 되어 주셨습니다.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셨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의 감도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모습을 우리에게 3번 보여 주십니다. 말구유에 누워계신 가난한 모습으로, 옷 벗겨진 체 십자가에 매달리신 모습으로, 그리고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바로 ‘파스카’의 무덤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그런 무덤입니다. 가난은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가난은 기다리게 해 줍니다. 그 기다림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힘입니다.

성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정결’하셨습니다. 정결은 성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정결은 상대방에 대한 충실함입니다. 혼인은 두 사람이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좋은 감정도 있지만 서로에 대한 실망이 생겨나고, 결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결혼이란 이제 두 사람이 얼굴을 돌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체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우리에게 충실하십니다. 우리가 죄 중에 있어도, 우리가 그릇된 길을 걸어갈 때도, 우리가 이기심과 교만함에 가득차 있어도 우리에게 충실하십니다.

혼인을 할 때 신랑과 신부는 이렇게 서약을 합니다. ‘나는 배우자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언제나 한결같이 사랑할 것을 약속합니다.’ 성체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 ‘정결’하십니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충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 한 기자기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수녀님의 헌신적인 사랑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결국 수녀님께서는 실패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수녀님께서 그렇게 하셨어도 지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고, 가난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성공하는 것이 나의 목표가 아닙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저는 다만 저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저는 약합니다. 저는 한 번에 한 아이만을 품에 안을 수 있습니다. 제 팔에 안긴 한 아이에게 충실할 뿐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신다면 바로 예수님의 ‘정결’함을 배워야 합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충실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이 나를 미워해도, 나에게 잘못을 했어도 충실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 자매님께서 이런 고민을 이야기 했습니다. ‘90이 넘은 친정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요. 어릴 때 오빠들만 학교에 보내 주었고, 딸이라고 너무나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제게 의지하는 아버지를 돌봐드려야 하는데, 마음에는 미움이 가득차 있어요.

신부님께서는 그 자매님께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자매님의 마음에 있는 아버지는 지금 병들어 누워있는 90세의 아버님이신가요? 아니면 어릴 때 자매님을 차별하던 아버님이신가요? 예수님께 아버님을 봉헌해 보세요.’ 자매님은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담았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예수님께 봉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숨을 쉴 때 ‘들숨과 날숨’을 쉽니다.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고, 내 안에 있는 더러워진 공기를 내 보내는 것이 호흡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아기는 목에 있는 이물질을 내 보내야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잘못된 것들 ’원망, 미움, 분노‘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 위로, 희망‘을 주십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 안에 상처는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는 그릇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상처에 분노와 원망과 미움을 담으면 상처는 덧나고 더 커지게 됩니다. 그 상처에 사랑과 용서와 인내를 담으면 상처는 아물게 됩니다. 무엇을 담는가는 우리들의 선택입니다. 하느님께 나의 원망과 미움과 욕심을 드리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위로와 희망과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순명’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성모님도 같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때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때, 용서도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질 때,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 순명하십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십니다.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두 번째는 사제에게 순명하십니다. 사제가 밀떡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 예수님께서는 사제의 상황을 보지 않으시고 순명하십니다. 사제가 죄 중에 있어도, 사제가 부족해도 성체로 변하십니다. 사제가 성체를 감실에 모실 때도 예수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감실로 들어가십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조용한 성당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순명하시기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본당에서 사제의 허물을 문제 삼아 신자들이 둘로 나눠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쪽은 그래도 신부님을 지켜 드리자는 편이었고, 다른 한편은 교구청에 말씀드려서 신부님을 내 보내자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신부님을 반대하는 신자들은 사제의 축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사제의 손에 의해서 축성된 성체를 인정하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어떤 상태에 있어도 예수님께서는 사제의 축성으로 성체로 변화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순명입니다.

세 번째로 성체로 변하신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순명하십니다.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면 신자들은 ‘아멘’이라고 응답하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이제 우리의 몸은 감실이 되는 것입니다. 성체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상황을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조용히 우리에게 순명하시면서 우리의 몸에 함께 하십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체이신 예수님의 ‘가난, 정결, 순명’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삶도 복음삼덕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성체를 받아 모실 때, 우리는 예수님의 ‘가난, 정결, 순명’을 배워야 합니다.

 

 

댓글 2

  • 2009년 11월 12일 오전 7:42

    아멘!

  • 2009년 11월 12일 오전 9:5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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