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엽 신부님의 ‘통하는 기도’ 강의 요약

2009. 9. 24. 오전 7: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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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차동엽 신부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방송과 책을 통해서 많이 알려지신 신부님이기에 굳이 소개가 없어도 되는 분이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해설해 주시면서 하느님과 통하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셨습니다. 오랜 강의와 연구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신부님께서는 함께하는 시간을 ‘은혜의 밤’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신부님을 섭외하시고, 많은 준비를 해 주신 ‘성령 기도회’ 봉사자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특별히 통하는 분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시기도 하셨지만, 그분께서는 하느님과 통하는 기도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기도를 하였지만, 하느님과 통하는 기도를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구약의 사람들도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시편’은 아름다운 기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보다 특별한 기도를 알고 계셨고, 기도를 몸소 하셨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자주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지금부터 주님의 기도의 맛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 이 말은 하느님께서는 하늘 높은 곳에 계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인식범위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식차원을 넘어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하늘은 우주의 어느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우리 아버지 :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지만 기도의 선물은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유대인만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나의 가족만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모든 이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거룩하고, 엄위하시고, 높으신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주 가까운 ‘아빠, 아버지’ 인식하셨습니다. 정겹고, 친근한 아버지께 기도 할 수 있도록 안내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상관이 없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음성을 아시고,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는 가까운 분이 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다른 신들은 사람들이 이름을 정했습니다. ‘해신, 달신, 별신’과 같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직접 당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명함’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명함을 주시면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하느님을 찾으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까? 우리가 환난의 때에 하느님을 찾으면 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느님을 자주 찾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을 힘들고 어려울 때 28%만이 하느님을 찾는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느님을 찾지 않고, 점을 보거나, 술집에서 해결하려하는 가톨릭 신자가 많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의 때에 하느님을 찾지 않아서 힘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하고, 죄를 지을 때 힘들어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감사’ 할 일이 있을 때,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갓집’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집과 같은 개신교 신자들보다 ‘감사’하는 마음을 적게 갖는 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주셨는데,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이 적고, 개신교 신자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많이 가지니, 하느님의 마음도 흔들릴 거라 말씀을 하십니다.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에사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권’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장자권을 받기위해서 해야 하는 책임을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이방인 여인을 만나지 않는 것,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장자권’을 대수롭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은총의 힘을 알았습니다. 현재에 살면서 미래를 생각했고, 하느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야곱과 에사오의 ‘장자권’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은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알려줍니다. 이것은 구약의 먼 이야만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대로 주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사랑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들도 3부류가 있습니다. 그냥 신자입니다. 이분들은 주일만 겨우 지키는 분들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성당에 나오지 않고,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제자 신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배우는 신자들입니다.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는 신자들입니다. 평일미사도 참석하고, 많은 피정과 교육에 기꺼이 참여하는 신자들입니다. 다음은 사도 신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목격했고, 성령강림으로 굳건해진 신자입니다. 이제 당당하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모든 박해와 시련까지도 감수 할 수 있는 신자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자가 되어야 할까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 무엇이 아버지의 뜻일까요? 그것을 우리는 창세기 50장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찾아온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형들은 악을 행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어떤 악한 것들도 선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드릴 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선순환’이 되어서 더욱 커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불평과 원망’을 가질 때 감사할 일은 점점 적어지는 ‘악순환’이 됩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감사할 일이 더 많아지는 ‘선순환’이 이루어집니다.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선교’입니다. 많은 영혼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하느님께서는 바라고 계십니다. 두 번째는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십분의 일을 바치시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재물, 우리의 능력, 우리의 에너지를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 사업에 함께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많이 봉헌하는 사람은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통해서 그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에 비해서 ‘봉헌’에 인색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양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적인 양식과 물적인 양식입니다. 영적인 양식은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에서 주어집니다. 믿음이 약하다고 말하는 분은 성서를 자주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는 우리에게 굳센 믿음과 소망을 주십니다. 꿈은 꿈을 꾸는 자에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꿈꾸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반드시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성서는 믿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말씀의 식탁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믿음과 소망’을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넘치는 성찬의 식탁이 있습니다. 성체는 예수님의 마음, 바로 성심입니다. 성심에서 사랑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조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100명당 범죄를 범할 확률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다른 종교보다는 천주교 신자들이 죄를 범하는 비율이 낮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랑이신 ‘성체’의 양식을 받아 모시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음은 육적인 양식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사용 계획서’도 말씀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얻는 것들을 이웃과 나누고 감사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 하느님께서는 ‘세례’를 통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의 모든 죄를 ‘통’째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합니다. 우리가 죄인을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가 잠을 자지 못하고, 잠을 못자면 우리가 병들고, 병든 우리가 일찍 죽으면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 나의 가정에, 나의 직장에 증오와 원망, 미움과 분노를 가지고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신성한 땅에 그런 것들은 버리고 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에서도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이것은 이중 장치입니다. 유혹의 자리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설사 유혹에 빠졌다고 해도 그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악과 맞서서 싸우면 이길 수 없습니다. 악의 유혹은 그만큼 강하고, 그만큼 짜릿하기 때문입니다. 가랑비에도 옷은 젖습니다. 매 앞에 장사는 없습니다. 기름을 들고 불 옆에 가야 이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악과 싸워서 이기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의 것으로, 사랑으로, 자비로 채워야 합니다. 쓰레기를 채우면 아무리 좋은 물건도 ‘쓰레기 통’이 됩니다. 사랑을 채우면, 자비를 채우면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이 됩니다. 무엇을 채울 것인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이해할 수 있는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하느님과 ‘통’하는 기도로 삶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 3

  • 2009년 9월 24일 오후 10:57

    아멘!

  • 2009년 9월 26일 오후 6:17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천주찬미!

  • 2009년 9월 29일 오후 3:49

    저는 차동엽 신부님의 '통하는 기도' 책을 읽고 강의를 들었는데 역시 저자와의 만남이라 좋았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요약서가 더 마음에 드네요 감사합니다.자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강력하게,확신에 찬 기쁨으로 다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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