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학교에서 피정 중인 학생들은 ‘설날’에도 가족들과 함께 지내지 못했습니다. 20여일이 지난 요즘 학생들이 하는 묵상은 3주간입니다. 3주간의 주제는 ‘주님의 수난’입니다. 학생들은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바라보며 고난의 순간을 함께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땀을 닥아 주었던 베로니카처럼 주님 수난의 길을 함께 가려고 합니다. 주님의 수난, 수치와 모욕, 처절한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일들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 때문에 걸어가신 길이기에 함께 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문학의 장르 중에 ‘悲壯美’가 있습니다. 슬프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4대 비극을 통해서 인간 내면에 있는 갈등과 아픔을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왕’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원하고,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겪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절망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머피의 법칙처럼, 우리들이 원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현실입니다. 시인 정호승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저도 어제 ‘설날’에 부모님께 가지 못했습니다. 본당의 미사도 있었고, 신학교에서 학생들과의 면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화를 드릴 때, 함께 계셨던 자매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을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전화를 하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신부님이 오실 줄 알았을 겁니다!’며칠 전에 이번 설날은 집에 가지 못할 거라고 전화를 드렸는데, 다시 전화를 드렸으니, 어머니께서 집에 오실 거라는 기대를 하셨을 거라 하십니다. 전화를 드리면서도 새해 인사를 못했습니다. 저처럼 설날에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전방을 지키는 군인들, 근무를 서야하는 경찰, 소방관들이 있습니다. 병원에 있어서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는 분도 있고, 해외에 출장을 가서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하고, 설날에는 그렇게 지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을 또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피정 중에 있는 학생들이 영적으로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포는 끊임없이 주위에 있는 다른 세포에게 영양분을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세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양분을 나누지 못하는 세포는 ‘암’세포가 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틀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새해에는 나라는 틀에 갇혀있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의 것들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