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2012. 6. 29. 오전 5: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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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안녕합니까?
어제까지 ‘향심기도’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침묵피정이었습니다. 피정지도하시는 신부님께서 침묵에는 3가지 차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의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몸의 침묵입니다. 세 번째는 행동의 침묵입니다. 진정한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서도 침묵이 있어야 하며, 생각마저도 온전히 하느님을 향하는 침묵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세례를 받아서 교적 상으로는 신앙인인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교적 상으로 신앙인이면서 말과 행동이 신앙인다워야 합니다. 말과 행동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면서 이름만 신앙인이라면 무늬만 신앙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두 분은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참된 신앙인입니다. 하지만 이 두 분은 완벽한 신앙인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열정은 있었지만 그것을 꽃피울 냉철한 이성은 부족했습니다. 말은 하였지만 그것을 실천할 추진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죽을 때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자들을 잡으러 가던 길에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해박한 지식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세운 교회에 편지를 보냈고, 그의 편지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강한 추진력 때문에 때로 다른 사도들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오로의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그에게 초대교회를 이끌어 갈 사명을 주셨습니다.

가끔씩 교우분들께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자상하신데, 다른 신부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나요?’ 저는 자상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당 사목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어르신들께서 좋아하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베드로 사도처럼 열정은 있지만 추진력이 부족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바리사이파처럼 주님을 따르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전임 신부님이신 윤종국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사제로서 충실하게 사목을 하셨듯이, 저의 후임 신부님께서도 그렇게 주님의 종으로서 사목을 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사제가 오느냐 이기 보다는 이곳에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느냐 입니다.

이번 피정 중에 ‘바오로’본명을 가진 동창신부님과 함께 했습니다. 올해로 만 30년을 함께한 동창입니다. 언제나 활달하고, 친구들을 몰고 다니는 신부님입니다. 담배도 맛있게 피우고, 술도 한번 마시면 끝을 보는 친구였습니다. 그런 친구가 3년 전부터 삶의 태도가 변하였습니다. 좋아하는 담배, 술을 끊었습니다. 말도 조금 함부로 했었는데 말투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더니 지난해에는 교구 성령기도회 전담신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제가 알던 동창은 성령기도회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바오로 사도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 주셨듯이, 나의 동창 신부에게도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너무 빠른 것도, 너무 느린 것도 없습니다. 천년도 하느님 앞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완벽한 것도, 똑똑한 것도, 재능이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흘렸던 참회의 눈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보여주었던 새로운 삶으로의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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