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갑처럼 가까이 지니고 다니는 것, 여러 가지 기능이 있어서 교통카드도 되고, 은행 결제도 할 수 있는 것, 인터넷이 돼서 많은 정보를 볼 수 있는 것, 원하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 이것은 ‘핸드폰’입니다.
예전에 핸드폰 광고 중에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잠시 꺼 두셔도 좋습니다.’ 핸드폰은 늘 켜 두어야 하는데, 소중한 이와 함께 있을 때는 꺼도 된다는 그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장례미사 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습니다. 미사 시간에 울리는 ‘벨소리’는 소중한 시간을 깨트리는 소리입니다. 차를 타고 함께 갈 때는 가능하면 통화는 짧게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간혹 동승한 사람이 있는지 상관하지 않고 길게 통화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 또한 소중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일가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12,2)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복의 씨앗이 되게 하고, 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부족하고, 겁도 많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불러 주셨고, 믿고 따르면 많은 복을 내리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데서 시작합니다. 사람의 능력이나, 업적이 아닙니다.
창세기 45장에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넘긴 형제들을 용서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려고 하느님께서 나를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의 오두막이 있습니다. ‘요셉에게 상처의 오두막은 형들의 학대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입니다. 또한 경비대장(포티파르) 아내의 모함입니다. 요셉은 그런 상처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상처의 오두막을 은총의 시간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상처의 오두막에 머무는 사람은 분노와 미움이 가득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만날 수 없고, 자신의 오두막에 갇혀서 살게 됩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떠올려서는 용서와 치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상처가 하느님의 이끄심,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는 치유해 주시고,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나무의 나이테는 매서운 겨울을 이겨냈다는 증표입니다. 나이테가 굵은 것은 그만큼 힘든 겨울을 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나무는 더 높이 자랄 수 있으며,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식, 허영, 위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들은 교만함에서 나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선을 베풀 때, 기도를 할 때, 단식을 할 때’에도 드러나지 않게 겸손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업적을 알리고 싶어 하고,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성공을 위한 경력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이 알아주는 명예와 업적 때문에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