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 11월 1일 ‘위령성월’에 본당 하루 피정이 있었습니다. 교육분과 소속인 성령기도회에서 피정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본당 신자뿐만 아니라, 다른 본당에서 오신 분들도 하루 피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위령성월을 맞이해서 피정을 하고 싶은데 시흥5동에서 피정을 한다고 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본당에서 하는 피정에 다른 본당의 교우들이 오시는 것도 좋지만 본당의 교우들께서 더 많은 자리를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은 의정부 교구 소속이시고, 상장례 학교를 운영하셨으며 2000여분의 시신을 염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한이 많은 시신, 억울한 시신들은 염을 할 때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의탁하였던 시신은 염을 하는 것도 편하였다고 합니다. 해박한 지식을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제 신부님의 강의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은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들은 근심, 걱정, 불안, 좌절, 실망, 분노, 미움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근심덩어리, 걱정거리, 불안과 좌절이 가득찬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희망, 평화, 기쁨, 위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또 그렇게 살만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신부님은 ‘위령성월’은 죽은 이들만을 위한 성월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위령성월 첫날에 ‘모든 성인을 기억하는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을 ‘위령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령의 달은 죽은 이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인들과 함께 통교를 나누는 달이라는 것입니다. 즉 위령성월은 산 이와 죽은 이 그리고 천상의 성인들이 함께 주님을 드높이는 달입니다. ‘연도’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연도는 나의 삶을 돌아보고, 정화하며 하느님께 우리들의 신앙을 드높이는 기도입니다.
저는 그동안 연도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바치는 기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은 우리의 연도를 듣지 못합니다. 연도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바치는 기도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이를 기억하며 우리들 또한 언젠가 저렇게 죽음을 맞이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나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며 주님께 우리들의 신앙을 드높이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연도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어릴 때 추억을 하나 말해 주었습니다. 목욕탕에서 할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렸는데 할아버지의 몸에서는 ‘흙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몸에서 흙냄새가 나요?’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나는 이제 흙으로 돌아가려니 흙냄새가 나는가 보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몸의 많은 기능들이 약해집니다. 피부도 거칠어지고 검버섯이 피어납니다. 이도 약해지고, 무릎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기억력도 약해지고 삶의 의욕도 떨어집니다. 그럴 때 너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야 갰습니다. ‘아! 가을에 나뭇잎이 떨어지듯이, 나도 이제 흙으로 갈 때가 가까워지는 구나!’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소년은 할아버지에게 또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살이 없어요?’ 할아버지께서 소년에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응 주님께서 주셨으니 주님께서 거두어 가는 거야!’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셨는데,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잠시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더 작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좀 더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 죽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것을 알아야만 진리를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인식의 전환, 열린 마음이 우리를 진리의 문으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묵주기도에 대해서도 말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많은 것을 청하기보다는 하느님과 대화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한 아이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술을 끊고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성서를 펼쳐놓고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퇴근해서 오니, 아이가 성서를 펼치고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성서를 읽고 있니!’ 아들은 말합니다. ‘예’ 성서가 무슨 이야길 하니.’ 아이가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7일 째는 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을 합니다. 아버지도 일주일에 하루는 술을 쉬면 좋겠네요. 아버지는 하느님보다 강한 분이 아니잖아요.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말을 합니다. 나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아버지는 그 뒤로 술도 끊고, 냉담도 풀고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떼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성서를 앞에 두고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할 때 십자가에 친구(親口)를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 고상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십자가의 친구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친구하는 것은 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러나 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친구하는 것은 성모님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죽은 이의 몸을 보는 것은 유족들에게 속한 일입니다. 죽은 이의 몸에 입을 맞추는 것은 아주 가까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매달려서 죽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십자가에 친구를 한다는 것은 성모님처럼 예수님과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친구한다는 것은 성모님처럼 순명의 삶을 인내의 삶을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우리가 걱정과 근심 중에 있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욕심대로 산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지 않고 묵주기도를 해도 무방합니다. 십자가에 입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성모님처럼 순수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위령성월을 시작하며, 신부님의 유익한 강의를 잘 들었습니다.
위령성월에 성직자 묘지를 방문하거나, 성지순례를 하고 매일 미사를 참례하면 신앙의 은총을 얻습니다. 그 은총은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어제 11월 1일 ‘위령성월’에 본당 하루 피정이 있었습니다. 교육분과 소속인 성령기도회에서 피정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본당 신자뿐만 아니라, 다른 본당에서 오신 분들도 하루 피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위령성월을 맞이해서 피정을 하고 싶은데 시흥5동에서 피정을 한다고 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본당에서 하는 피정에 다른 본당의 교우들이 오시는 것도 좋지만 본당의 교우들께서 더 많은 자리를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은 의정부 교구 소속이시고, 상장례 학교를 운영하셨으며 2000여분의 시신을 염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한이 많은 시신, 억울한 시신들은 염을 할 때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의탁하였던 시신은 염을 하는 것도 편하였다고 합니다. 해박한 지식을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제 신부님의 강의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은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들은 근심, 걱정, 불안, 좌절, 실망, 분노, 미움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근심덩어리, 걱정거리, 불안과 좌절이 가득찬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희망, 평화, 기쁨, 위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또 그렇게 살만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신부님은 ‘위령성월’은 죽은 이들만을 위한 성월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위령성월 첫날에 ‘모든 성인을 기억하는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을 ‘위령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령의 달은 죽은 이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인들과 함께 통교를 나누는 달이라는 것입니다. 즉 위령성월은 산 이와 죽은 이 그리고 천상의 성인들이 함께 주님을 드높이는 달입니다. ‘연도’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연도는 나의 삶을 돌아보고, 정화하며 하느님께 우리들의 신앙을 드높이는 기도입니다.
저는 그동안 연도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바치는 기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은 우리의 연도를 듣지 못합니다. 연도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바치는 기도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이를 기억하며 우리들 또한 언젠가 저렇게 죽음을 맞이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나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며 주님께 우리들의 신앙을 드높이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연도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어릴 때 추억을 하나 말해 주었습니다. 목욕탕에서 할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렸는데 할아버지의 몸에서는 ‘흙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몸에서 흙냄새가 나요?’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나는 이제 흙으로 돌아가려니 흙냄새가 나는가 보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몸의 많은 기능들이 약해집니다. 피부도 거칠어지고 검버섯이 피어납니다. 이도 약해지고, 무릎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기억력도 약해지고 삶의 의욕도 떨어집니다. 그럴 때 너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야 갰습니다. ‘아! 가을에 나뭇잎이 떨어지듯이, 나도 이제 흙으로 갈 때가 가까워지는 구나!’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소년은 할아버지에게 또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살이 없어요?’ 할아버지께서 소년에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응 주님께서 주셨으니 주님께서 거두어 가는 거야!’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셨는데,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잠시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더 작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좀 더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 죽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것을 알아야만 진리를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인식의 전환, 열린 마음이 우리를 진리의 문으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묵주기도에 대해서도 말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많은 것을 청하기보다는 하느님과 대화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한 아이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술을 끊고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성서를 펼쳐놓고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퇴근해서 오니, 아이가 성서를 펼치고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성서를 읽고 있니!’ 아들은 말합니다. ‘예’ 성서가 무슨 이야길 하니.’ 아이가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7일 째는 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을 합니다. 아버지도 일주일에 하루는 술을 쉬면 좋겠네요. 아버지는 하느님보다 강한 분이 아니잖아요.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말을 합니다. 나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아버지는 그 뒤로 술도 끊고, 냉담도 풀고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떼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성서를 앞에 두고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할 때 십자가에 친구(親口)를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 고상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십자가의 친구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친구하는 것은 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러나 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친구하는 것은 성모님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죽은 이의 몸을 보는 것은 유족들에게 속한 일입니다. 죽은 이의 몸에 입을 맞추는 것은 아주 가까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매달려서 죽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십자가에 친구를 한다는 것은 성모님처럼 예수님과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친구한다는 것은 성모님처럼 순명의 삶을 인내의 삶을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우리가 걱정과 근심 중에 있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욕심대로 산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지 않고 묵주기도를 해도 무방합니다. 십자가에 입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성모님처럼 순수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위령성월을 시작하며, 신부님의 유익한 강의를 잘 들었습니다.
위령성월에 성직자 묘지를 방문하거나, 성지순례를 하고 매일 미사를 참례하면 신앙의 은총을 얻습니다. 그 은총은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