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3 주간 월요일 성 토마스 축일 마르코 3,22-30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갑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어간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발견하면, 우리는 다양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기도 하지만, 때로는 틀어진 관계를 갖게 만든 것을 타인에게 돌리며 그 사람을 비방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험담을 하게도 됩니다.
이런 관계성은 단지 개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모든 관계성이 있는 곳에 이런 다양한 반응들이 존재합니다. 종교 사이에, 정치 사이에, 국가 사이에, 기업 사이에, 이웃 사이에 이런 관계성이 존재합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틀어진 관계를 풀 수 있는 것일까 주님 앞에 질문을 던져 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베엘제불이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들 앞에 답으로 주십니다. 타인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서 판단하고 짐작하는 것으로 짖는 많은 죄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를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 어쩌면 누군가를 판단하고 짐작함으로써 우리는 그 안에서 자신의 초라함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의 저자는 인도의 거리를 걷다가 손가락이 두개 밖에 없는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는 그가 들고 있는 피리를 바라보며 의아함을 가졌다고 합니다. 손가락이 두개 밖에 없는 문둥병 환자가 왜 피리를 들고 다닐까? 그는 그 문둥병 환자를 지나 계속 인도의 거리를 기웃거렸다고 합니다. 얼마를 걸었을까, 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리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당도해 놀라운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자신이 무시했던 그 문둥병 환자가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아름다운 음율을 뱉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 합니다.
“그는 손가락이 두세 개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곡을 불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연주할 수 있는 그 한 곡에 최선을 다했으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감정을 가락에 얹었다. 사실 손가락 두세 개밖에 없는 문둥이를 누가 흉내 낼 것인가. 그것은 어떤 세계적인 음악가도 흉내 내지 못하는 연주였다. 나는 피리 곡조에 이끌려 어스름 저녁에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주머니의 돈을 털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픈듯하면서도 애잔한 초월의지가 담겨 있는 곡조는 어김없이 내 발길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종교가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누구는 이쪽 편에 서 있고 누구는 저쪽 편에 서 있다고 해서 우월감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진실성이며 자신이 삶에 깨어 있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혹시 오늘도 누군가를 판단하고 살아간다면 내 자신도 누군가에게 판단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