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6 주일 강론

김재화

2005. 9. 26. 오후 10:32:42

연중 제 26 주일

지난 주 우리는 새벽부터 일한 일꾼과 저녁에 일한 일꾼에 대해 들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일찍 주님을 만난 사람과 늦게 주님을 만난 사람, 즉 세례의 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씀해 주셨다. 지난주의 말씀에 이어 오늘 예수님은 새로운 비유를 하나 들려주신다. 두 아들에 대한 비유. 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거절을 했으나 바로 뉘우치고, 아버지의 말을 실천한다. 그러나 둘째는 아버지의 말에 동의를 했으나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나 사두가이와 같이 고지식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겠지만, 우리시대에는 이 말씀이 새롭게 해석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 시대에 누가 바리사이, 율법학자, 사두가이인지를 우리는 돌아보아야 하겠다. 신앙상담을 하면서 자주 듣는 말 중에 한가지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선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럴 때면 마음이 아프다. 분명히 나에게 신앙 상담을 하는 분들도 신앙인인데,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상처를 주었기에 이런 말까지 하는 것일까? 어쩌면 더 가깝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어쩌면 같은 신앙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더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해보게 된다. 왜 이런 상처들이 교회 안에서 계속 해서 생기는 것일까? 예수님 시대에 존재했던 의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세대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말은 듣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쫓아 스스로를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사람들. 아마 바로 우리들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가 의롭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으니까.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무엇이 바른 길인지 스스로 깨닫고, 그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두꺼운 삶의 때를 양심에 쌓았기에 스스로 그 양심이 가리키는 길을 걸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해 성사를 준비해 놓으셨다. 뉘우침의 성사를 말이다.
미국에 와서 놀란 것은 미국 사람들은 고해 성사를 잘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사를 드리다 보면 분명히 성체 성사 때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성체를 영하러 나오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더욱이 그 분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었을 때는 더 나를 놀라게 한다. 토요일 교회는 늘 신자들을 위해 고해의 시간을 마련해 주고 있다. 한 시간 동안 고해소에 앉아 있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처음에 미국에 와서 고해성사를 주던 때가 생각난다. 사순절이 시작되면서 시작된 고해성사. 난 한국에서 보속으로 드리던 묵주기도 5단을 미국 신자들에게 보속으로 주었다. 난 한 번도 묵주기도 5단이 많은 보속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 드린 보속이었기에...그런데 내가 고해 성사를 잘 했는지 알아보려고 물어보던 주임 신부는 나의 말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는 다음부터 신자들에게 그렇게 많은 보속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청을 나에게 했다. 그럼 그나마 고해 성사를 드리던 분들도 보속으로 인해 고해소에 오지 않을 것을 주임 신부는 걱정을 했다. 그때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왜 그 때 그 신부님이 그런 말을 했는지 실감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는 사회, 아니,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 그런 사회는 법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인간다운 삶을 서로가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모욕하며 법정까지 갈 수 있겠는가? 인간다움이 최소화될 수밖에 없는 곳. 법이 아니라, 인간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가 더 우리에게 필요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다움을 회복할 기회를 주셨다. 내 스스로를 돌보고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를 돌아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알고, 행해야 할 바를 실천할 수 있다면 누군가를 찾아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른 사람을 노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는 나 자신의 죄를 다른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의 동조를 받으려 한다. 그리고 그렇게 동조를 한 사람도 같이 죄를 짓게 한다. 스스로를 잘 돌아보고,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길을 걸어갔으면 한다. 만약 태초의 인간에게 고해소가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이 우리들 마음에 죄를 심고 살지는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댓글 6

  • 2026년 5월 17일 오전 8:51

    양심에 두꺼운 때가 쌓이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합니다. 낯설고 어려운 환경에서 사목하시는라 애쓰신 신부님 존경하고 고맙습니다.

  • 2026년 5월 17일 오후 6:36

    자신에게 관대함 타인에게는 엄격함에 빠지기 쉬운유혹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는 고백성사 낯선곳에서 서로다름을 잘 견디며 애쓰신 신부님 존경합니다.

  • 2026년 5월 18일 오후 2:40

    무디어진 양심을 성찰하며 작은일에도 바른양심을 갖고살수있도록 성령의 도움을 청하며 낯선곳에서 사목하시느라 야쓰신 신부님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존경합니다.

  • 2026년 5월 18일 오후 4:31

    낯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 잘 견디시며 애쓰신 신부님께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저또한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살아가도록 은총을 구해봅니다.

  • 2026년 6월 19일 오전 11:55

    죄송합니다. 저도 고해성사를 띄엄띄엄 보아서요 깊이 반성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성찰도 잘 되지 않고 생각도 잘 안나고 그냥 주님 앞에서 애를 써도 잘못하고 죄 지은것은 많은 것

  • 2026년 6월 19일 오전 11:57

    같은데 생각이 잘 나지 않고 통회도 잘 되지 않아 무척 고민을 하다가 고백성사를 볼 때가 있습니다. 늙어서라기 보다 깊은 성찰과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어서 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