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평화신문에 실었던 글이다.
이렇게 신문에 인쇄된 글을 보니, 어색하기만 하다.
내 마음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난 듯한 ...
'작은 소리'에는 내 마음을 아무렇게나 옮겨도 챙피하거나 부끄럽지 않은데 말이다.
신문에 실린 글을 이 곳에 다시 옮겨본다.
내 부끄러움을 이 작은 곳으로 옮겨 오는 마음으로....
한 유치원생이 소풍을 갔을 때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 시냇물은 어떻게 저 아름다운 소리를 내나요?" 시냇가에서 나는 졸졸 흐르는 소리. 선생님은, 한 번도 그 소리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어서,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그 질문을 품고 돌아와 도서관에 갔습니다. 그 질문의 답은 물 속에 수많은 '돌맹이'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작은 시냇물이 흐름을 시작할 때에는 그 돌맹이들이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흐름을 시작한 시냇물에게 돌맹이는 장애물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알리는 노래의 악기가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삶은 수많은 돌맹이를 품은 시냇물과 같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첫발을 내딛었을 때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짐스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삶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기도가 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십자가의 수가 많으면 많을 수록 우리들의 삶은 아름다운 기도가 됩니다. 훗날 우리의 여정을 다한 후에 돌아본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시냇물과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신앙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가 따르고 믿는 예수님. 그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의 삶. 그들의 삶조차도 처음에는 예수님께 커다란 장애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믿음으로 돌리시기 위해 물을 술로 변화시키고, 성난 호수를 잠재우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수많은 사람을 배불리는 수고를 겪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물길을 내주시기 위해 그토록 수고를 하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베드로만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조차도 예수님은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입술을 열어 주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무딘 그들의 마음에 신앙을 심어 주시기 위해 결국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목숨을 내어놓으시고, 부활하시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시는 수고를 겪어야 하셨습니다. 12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온 삶을 바치셔야 했던 것입니다.
신앙을 산다는 것,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 아닌가 봅니다. 영세를 받았다고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는 없나 봅니다. 매일 성체를 영하면서도 죄스럽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운 나날의 연속입니다. 주님 앞에 깨끗한 몸과 영혼을 갖기에는 - 고해성사의 은총이 없다면 - 불가능한 존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곁에는 12제자를 위해 물길을 만들어 주시던 예수님조차도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역할을 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홀로 서기 신앙'은 우리들에게 불가능함을 12제자들의 삶은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들의 관계 속에 예수님은 든든한 바윗돌로 존재하십니다.
어쩌면 지금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제 인생의 시냇물에 작은 돌맹이를 하나 쌓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이 글을 씀으로서 저는 또 누군가에게 저의 삶을 노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는 아름다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그마한 바램을 가져 본다면, 이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자그마한 파동을 만들며 떨어지는 돌맹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2005년 7월에.
포토맥 자비의 모후 김 재화 시몬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