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3 주일을 맞이하면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올려 본다.
치과 의사가 되려고 시험을 준비하는 정수와 일을 하고 있었다. 정수는 늘 무슨 일에나 열심히 하는 청년이다. 그는 그 날도 우리가 하고 있던 일에 몸을 바치고 있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즈음에, 정수가 나에게 물었다, 불현듯,
"신부님, 신부 생활하시기 괜찮아요?"
처음에는 이 질문을 듣고 당황스러웠다. 질문자체가 너무나 무례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이 든 것이 첫째 이유였고, 무거운 짐들을 나르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대답을 하기에는 나에게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때 나는 정수가 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무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힘든 육체 노동 뒤에 휴식을 취하고, 하루가 지난 다음날 아침 기도시간에 다시 정수의 이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어제의 그 상황이 생생하게 다시 귀에 들리는 듯 했다.
"신부님, 신부 생활하시기 괜찮아요?"
왜 정수가 나에게 이 질문을 했을까? 내가 정수 보기에 신부 생활을 어렵게 하는 것으로 비추었을까? 정수가 신부가 되고 싶은 것일까? 신부 되는 것이 바보스럽게 느껴졌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내 생활에 대해 묻게 되었다.
"난 신부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가?"
답은 내가 신부가 되기로 적극적인 마음을 가졌던 뒤로는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는 만족감이 내 마음을 채웠다. 그리고 지금도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음에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또한 태초에 아담을 빚으시고, 그가 외로울까봐 하와를 보내주셨듯이, 내가 힘든 짐을 지고 갈 때 위로가 되라고 주님은 동기 신부를 한 명 보내주시기 까지 하셨다. 주님의 배려를 생각하니, 저절로 감사의 기도가 드려졌다.
그리고 내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만약 내가 다른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만족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내가 꿈이 많은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도 현실적이지 못하긴 하지만, 내 스스로가 아직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스스로를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다른 생활'들을 떠 올려 보았다.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단지 사제가 아닌 삶을 사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생각하며, 얼마나 흐뭇한 시간을 가졌던지 모른다.
과연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고, 흐뭇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삶에 배려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바쁜데, 다른 사람의 삶에 시선을 돌릴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오늘 주님은 신앙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보다 예수님을, 그리고 그 분의 제자를, 그리고 예언자를, 그리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자기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타인을 위해 배려를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사람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이다.
오늘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얼마나 내 스스로를 사랑하며, 내 삶을 타인과 나누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