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는 ‘장춘’을 다녀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참 남는 것이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5시간 운전하고 가서 점심 먹고,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 30분 정도 있다가, 6시간 걸려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소팔가자 성당이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면 가이드도 욕을 먹었을 것이고, 아무리 신앙심이 깊다고 해도, 우리들 중에도 불평과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6개월간 걸어서 도착한 곳이 소팔가자 성당이고, 김 신부님과 최 신부님께서 공부하시고 부제품을 받은 곳이 소팔가자 성당이기에 우리는 비좁은 차 안에서도, 12시간 가까이 차를 타야하는 불편함까지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밤 11시가 넘어서 식사를 하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예전에 ‘로고테라피’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사람만이 의미를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빅터프랭클’이라는 심리학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만든 포로수용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인도 죽음의 문턱을 수시로 넘나들면서 의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사람만이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삶을 살아가면서 가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본능대로 살아갑니다. 이번 요셉회에서 주관하는 성지순례는 저에게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서양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류역사에 4명의 큰 스승이 있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이다. 이분들은 모두 진리를 우리에게 말하였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으로 진리를 얻고, 공자는 교육을 통해서 진리를 알고, 소크라테스는 지식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으며, 예수님은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고통을 체험합니다. 불가에서는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합니다. 그 집착을 없앨 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신앙인들 역시 고통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분이 ‘욥’성인입니다. 욥 성인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R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하였으니,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가지는 고통의 해결방법에도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 자신의 성찰, 깨달음으로 찾는 것입니다. 불교, 유교, 철학적인 사유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자비하심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방법입니다.
우리가 인생길에 만나는 고통은 4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애별리고, 미운 사람을 만나야 하는 원증회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 육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오음성고입니다. 불가는 이것을 명상을 통한 깨달음으로 없애려고 합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이것을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기려 합니다.
도자기는 그 주인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항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옹기장이 손에 맡겨진 진흙과 같이 내 영혼을 주님 손에 맡기나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둘째 아들이 태도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둘째 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 왔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바라보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큰 아들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습니다. 둘째 아들처럼 재산을 탕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의 결정적인 잘못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처럼 판단하려고 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잔치를 벌이는 것도 온전히 아버지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의 신앙심이 깊다는 이유로, 내가 많이 안다는 이유로, 내가 오랜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큰 아들과 같은 잘못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로 순례의 여정이 3일 째입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용서하시는 아버지처럼 옆에 있는 분들을 사랑하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