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는 ‘사제 성화의 날’이었습니다. 서서울 지역의 신부님들은 대방동 성당에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하였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을 제가 만들었습니다. 제가 교육 담당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피정에 참석하신 신부님들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왜 다른 지역은 11시 30분에 시작하는데 우리는 10시에 시작하느냐?’ 우리 지역의 피정 시간이 다른 지역보다 1시간 30분이나 길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시간 결정은 저 혼자만이 한 것이 아니고, 주교님과 함께 상의해서 결정 하였는데, 주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3시간 강의를 듣는데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제 주교님께서도 오늘 이렇게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도 오늘 참석하신 신부님들은 성화 되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제 강의의 주제는 사제들의 영성과 기도 생활이었습니다.
첫 번째 강의에서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이 드러난 것이 세상의 창조이다. 하느님께서는 공간을 만드시고, 그 공간에 해, 달, 별을 달아 놓으시고, 하늘에는 새, 물속에는 물고기, 땅위에는 풀과 짐승들을 만드셨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어울려서 살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드셨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하느님의 공동체성을 말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라고 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들어서 아담과 하와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고, 아담과 하와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서로의 몸을 보기보다는 인격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 악의 세력은 무엇을 심어 주는가? 그것은 부정적인 의식이다. 악의 세력이 첫 번째로 질문하는 것은 이것이다.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는 따먹으면 안 된다며?’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면서 악의 세력은 유혹을 시작한다. 악의 유혹을 따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이제 남에게 자신의 잘못을 돌리게 된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악의 세력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카인과 아벨의 경우도 그렇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동생의 제물만 받아 주신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사랑 받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동생을 시기하게 만들었고, 동생을 죽이게 만들었다.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에 머물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는 없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우리의 힘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해야 한다. 하느님과 함께하면 힘든 일들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하느님과 함께하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사라진다. 사제 생활을 잘하려고 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다만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께 맡기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알아서 해 주신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늘 생각하자! 우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받기 위해 태어났다. 늘 이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야 한다.”
두 번째 강의에서 신부님은 주로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히브리말로는 ‘하가'(Haga)라고 합니다. 하가는 성서 말씀을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에 가면 열심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손을 벽에 대고 계속 하느님의 말씀을 중얼거립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시작입니다.
희랍말로는 '멜레테'(Melete)라고 합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청소를 하면서도, 요리를 하면서도 무언가 중얼거리는 분이 있습니다. ‘나는 잘 할 수 있어. 예수 마리아 요셉’ 예전에 우리 어르신들은 ‘예수 마리아 요셉’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라틴 말로는 ‘메디타시오’(Meditatio)라고 합니다. 이는 배우가 대본은 외우는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배우는 대본을 외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중얼거리고, 반복해서 말하고, 대본을 외우듯이 외우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서방교회도 초기에는 바로 이런 기도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동방교회는 최근까지도 이런 기도 전통 속에서 생활했습니다. 동양의 종교에서 주문을 외우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무 관세음보살’을 계속 외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기도 전통이 서방 교회에서는 우리가 속한 로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기도란 지성을 이용해서 지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헤아리고, 분석하고, 그 안에서 무엇이 좋은 가를 찾아내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중세에 다시 등장한 ‘스콜라 철학’의 영향이고, 인문주의의 등장으로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분석하고, 성서의 말씀도 해석과 비판을 통해서 그 뜻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제 기도가 점점 어려워 졌습니다. 말씀을 분석하고, 뜻을 찾아야 하고, 그를 통해서 나의 생활을 개선해야 하는 지적인 작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방교회에서 나오는 묵상집, 기도서, 특히 준주성범은 이런 기도전통에서 만들어 졌습니다. 이런 기도는 철저히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하고, 통교하는 감성적인 부분이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도 신학교에서 기도를 배울 때, 바로 이와 같은 기도 방법을 배웠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교회는 그동안 추구했던 기도방법도 좋지만 기도의 역동성과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기도를 생각하면서 초대교회의 기도전통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까지 이어오는 동방교회의 기도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방교회의 기도를 알려준 책은 ‘이름 없는 순례자’입니다. 또 ‘실존의 추구’라는 책을 통해서 동방교회의 현자들이 이야기한 기도 체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호칭 기도, 마음의 기도’입니다. 요즘 많이 알려지고 있는 ‘향심기도’입니다. 고요한 중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성서의 말씀을 반복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과 지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삶 속에서도 하느님을 소외시킨 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호칭기도, 마음의 기도, 향심기도와 같은 것이 더욱 필요한 때라고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공한 사목자를 원하시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능력 있고, 학식이 뛰어난 제자들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사목자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잘하고, 그 안에서 많은 것을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하게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에 머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제 신부님의 강의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조금 하는 사제는 하느님에 관해서, 예수님에 관해서 강론하고 이야기 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 중에 있는 사제는 하느님을, 예수님을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과, 예수님의 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제 ‘사제 성화의 날’ 하루 피정이 조금은 힘들었지만, 사제의 영성과 기도의 필요성을 생각할 수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