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는 광주 교구 조 영대 신부님께서 예수 성심과 신앙생활이란 주제로 피정 지도를 해 주셨습니다. 새벽 3시에 보성에서 출발해서 서울로 오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예수님의 마음과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왜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는가를 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가장 완전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셔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와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유의지와 사랑 안에 살아 갈 때,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하느님과 일치하여 사신 분이 있는데 그분은 바로 ‘성모 마리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도미니꼬 사비오, 루이사 피카레타’는 어린 나이였지만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루이사는 어린아이였지만 주님의 성체와 온전히 일치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평생 누워만 있는 시련을 주셨지만 루이사는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60년 동안 오직 성체만을 모시면서 살았고, 다른 것들은 먹지 않았어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의 배반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도 아니었습니다. 군중들의 조롱과 군인들의 채찍질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라고 말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주님 어찌 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바로 하느님과의 단절이 예수님께는 가장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할 때 참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까이 하고 싶어 하시는데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하지 못하고 악의 세력과 일치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단절이고, 우리들 고통의 시작입니다.
‘선악과’라는 말은 과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선택하는지, 악의 세력과 일치하는지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과 단절은 우리에게 불행과 고통을 가져옵니다. 악의 세력과 손을 잡았던 아담은 아내 하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변명을 합니다. 하느님과 단절은 부부의 단절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카인과 아벨은 형제입니다. 하느님과 단절하였던 카인은 동생을 죽였고, 형제의 일치는 깨져 버렸습니다. 하느님과 단절하였던 사람들은 바벨탑을 만들었고 이제 사람들 사이에는 언어의 장벽이 생겼습니다. 하느님과의 단절은 부부, 형제, 이웃과의 단절을 심화시키게 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단절을 회복하는 가장 커다란 방법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와 사랑으로 하느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부부, 형제, 이웃과 일치를 이룰 수 있고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갈등과 아픔이 있습니다. ‘빈부와 격차, 이념과 사상의 대립,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 이런 것들은 바로 ‘소통의 부재’에서 옵니다. 하느님과 일치 할 때, 자유의지와 사랑으로 하나 될 때, 우리 사회의 갈등과 아픔은 비로소 해결 될 것입니다. 경제를 살리는 것으로, 정권이 바뀌는 것으로, 통합된 사상이 수립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순간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입니다. 세례의 순간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죄와 잘못이 깨끗하게 지워지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하느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의 단절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험담하고, 시기하고, 양심을 속이고, 욕심 때문에 친구와 이웃을 배반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참고 인내하기 보다는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분노하고 미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은 바로 하느님과 단절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주님과 온전하게 일치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이신 성체께서 우리 몸에 오시기에 우리는 합당한 준비를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분께서 우리의 몸에 오시는데,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죽으셨던 분께서 우리 몸에 오시는데 우리는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준비를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좋은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서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백대 일의 경쟁을 기꺼이 감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맛있는 집을 찾아서 몇 시간씩 운전을 해서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값비싼 선물을 기꺼이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잠시의 즐거움을 주고, 순간의 기쁨을 주는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셨던 분을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별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매일 성체를 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번 주님을 모시는 것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던 자매님께서 어느 날 특별한 체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병실에서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셨는데 그때부터 성체를 영할 때면 심장이 울렁거렸다고 합니다. 과연 이것이 무슨 문제인가 고민을 하다가 신부님께 면담을 하였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자매님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도 주님을 모시면서 그렇게 심장이 한번이라도 울렁거렸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셨는데 그 정도 울렁거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본당에도 성체를 받아 모시면 온 몸이 떨리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저도 처음에는 조금 놀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신부님의 강의를 듣고 할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그렇게 온 몸이 반응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과연 우리는 미사 때,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온 몸이 떨릴 정도로 그런 감동을 가지고 성체를 모시는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성체를 영하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오는 우리들의 태도는 과연 어떠한가를 생각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지 생각합니다. 성서는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과 일치하려고 하는 신앙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내 영혼이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나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 안에 머물 때까지 나는 늘 괴롭나이다.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고 싶어서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죽고 싶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이 일 때문에 나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들도 주님께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