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화요일

2009. 4. 7. 오후 6:50:14

글자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늘의 별수를 누가 알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강변에 모래알 누가 셀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어릴 때, 불렀던 성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신비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알기에는 우리의 그릇이 너무 작습니다.

물질의 최소단위는 전자입니다. 전자는 원자 안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닙니다. 원자는 분자 안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닙니다. 분자는 우리의 몸의 여러 부분을 구성하게 됩니다. 우리의 치아는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치아는 우리 몸의 입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입은 우리 몸 중에 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 동네에, 우리 동네는 우리나라에, 우리나라는 아시아 대륙에 아시아 대륙은 지구위에, 지구는 태양계 안에, 태양계는 우리 은하 안에 우리 은하는 수많은 은하 중에 한 부분이며, 은하들은 우주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주 작은 물질의 기본단위인 원자와 거대한 우주까지를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고, 그런 모든 것을 질서 지워 주시는 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에만 존재하고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틀을 넘어서는 것들이 있으며,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고, 미래에서 과거와 현재로 이동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은 우리들의 인식차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방법을 알기 보다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 이해의 지평 안에 들어오신 것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베드로와 유다를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똑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고,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의 삶이 전혀 달라졌음을 알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며 또한 희망을 버렸습니다. 희망을 버렸던 유다는 용서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유다는 쓸쓸하게 자신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베드로는 절망을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지난번 사순특강에서 박신부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부활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제 죄의 상태에서 돌아서서 다시금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당 지하에 놓아둔 차도 1주일만 있으면 먼지가 쌓이게 됩니다. 1달이 지나면 아무리 세차를 했어도 차는 먼지를 털어 주어야만 운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완벽하게, 깨끗하게 살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잘못과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댓글 3

  • 2009년 4월 7일 오후 11:33

    아멘.

  • 2009년 4월 8일 오전 8:00

    아멘!

  • 2009년 4월 8일 오전 10:10

    부활은 죄를 짓지않는것이 아니라.죄를 지어 넘어 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것입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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