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 우연히 텔레비전에 나온 김연아 선수의 손가락을 보았습니다. 손가락에 ‘묵주반지’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김연아 선수의 손가락에 있는 묵주반주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임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제는 박 신부님께서 ‘부활, 하느님 백성’이란 주제로 특강을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의 강의 핵심은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서에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죽은 나자로가 다시 살아나기도 했고, 백인대장의 딸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나자로도, 백인대장의 딸도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부활은 죽었지만 다시 죽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절망스럽게도 죽으셨지만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교회,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성서의 많은 이야기들은 사실 부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서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모세도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분들이 신앙인들의 조상이 되고, 굳센 신앙의 모범을 보인 것은 바로 하느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새롭게 변화되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기쁨을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막달레나는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막달레나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컸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고, 하루를 살지만 그것은 강물 위를 떠내려가는 나뭇잎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런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났고 이제 삶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참으로 부활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었습니다.
자캐오도 그렇습니다. 자캐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키도 작았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여유롭게 살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은 그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자캐오와 그의 가족들이 구원받았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난 후에 부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겠습니다. 제가 빌린 것이 있다면 4갑절로 갚아 드리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규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갔습니다. 그런 그는 다마스코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어 새로운 삶에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부활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졌던 사람들은 변화되었고, 이제 그들은 이 세상에서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곡선으로 직선을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난봉꾼, 술주정뱅이, 싸움꾼, 사기꾼, 도둑놈들을 변화시키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프란체스코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까지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의 길로 부르셨습니다. 도저히 재생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까지도 하느님께서는 희망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넘어졌지만 다실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지금 병중에 죽어간다고 할지라도, 희망을 갖고,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몸은 죽어갈지라도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제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절망 중에,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도 늘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아들의 성인식을 이렇게 만들어 줍니다. 아들을 캄캄한 정글 속에 데리고 가서 혼자 남겨 둔다고 합니다. 아들은 밤을 새워 정글 속에서 혼자 지내게 됩니다. 무서운 맹수가 다가 올 수도 있고, 혼자서 정글 속에 남겨진다는 것은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들은 다음 날, 새벽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는 밤새도록 아들 곁에서 아들을 지켜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의 성인식은 아들이 용감하게 정글에서 밤을 새우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위해서 밤을 새워 아버지가 아들 곁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활의 삶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늘 곁에 계심을 믿고, 착한 목자이신 하느님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순수해져서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이 보이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리에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이 자리 잡게 되면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죄의 가장 큰 유혹은 우리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없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이 너무 크기 때문에,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우리를 부활의 삶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눈과 같이,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부활의 삶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분명이 있습니다. 재판을 받고, 넘어지고, 멸시를 받고, 못에 박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는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넘어 부활의 삶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십니다. 부활은 시간의 개념이 아닙니다. 부활은 의미의 개념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한다면, 이제 나는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죄의 길에서 돌아와 하느님께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