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2012. 7. 22. 오전 4:59:25

글자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잘 생겼고, 일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과학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나름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본당신부와 손님신부의 차이점이 있는데 무엇일까요? 본당 신부는 태풍이 불어 비바람이 몰아치면 새벽에 일어나서 성당을 살펴보면서 비가 세는 곳은 없는 알아봅니다. 손님신부님은 그냥 자는 것입니다. MBC가 사상 유래 없는 파업을 하였습니다. 파업을 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사장이 방송을 위한 사장이 아니라, 권력의 눈치를 보는 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착한 목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착한 아들, 참된 부모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뉴스에 씁쓸한 소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80대 부모님을 자식들이 서로 모시겠다고 다투는 모습이었습니다. 큰 아들 집에 있는 부모님을 둘째 아들이 납치하듯이 모셔가려 했고, 큰 아들 부부는 둘째 아들의 차 앞에 누워서 부모님을 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 효도하는 마음이라면 좋겠는데 내용은 우리들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큰 아들은 둘째 아들이 부모님의 재산을 상속 받기 위해서 쇼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도 상속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을 하면서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합니다. 부모님에게는 한 달에 천만 원씩 월세가 나오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자식들은 그 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만일 그 부모님이 재산이 없었다면 자식들이 서로 모시겠다고 저렇게 다투었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저의 아버지는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서로 싸울 일이 없었습니다. 재산이 없었어도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버님께서 자식들에게 다른 것을 물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의 유산은 신앙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다른 모든 일보다도 주일을 지키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물려주신 아버님께 감사드립니다. 두 번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입니다. 아버님은 길이 아니면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정치를 하셨지만 한 번도 부정한 일에, 불의한 일에 발을 담그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였지만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는 독서입니다. 아버님은 늘 서예를 하셨고, 책을 읽으셨습니다. 성서를 필사하셨고, 돌아가시기까지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습니다. 책을 통해서 지식을 얻으셨고, 글을 쓰시면서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것은 빌딩과 그 빌딩에서 나오는 몇 천 만의의 월세는 아니지만 수백억의 재산보다 부럽지 않은 소중한 유산입니다.

예비자 교리반 봉사자와 예비자분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냉면, 비빔밥 등을 먹었습니다. 저는 그날 가슴이 뭉클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84세이신 어르신께서 파주에서부터 교리를 배우러 오신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직행버스, 지하철, 마을버스를 타시고 교리를 배우러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가실 때도 마찬가지로 마을버스, 지하철, 직행버스를 타고 가시는 거라 하십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짜증을 내는 저에게 할아버지의 모습을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동창신부님께 9월에 있는 강의를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날자와 시간을 말씀드렸고, 강의 주제와 시간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장소이야기를 하니까 좀 멀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장소가 멀면 잘 안 가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직 신앙을 잘 모르시면 서도 저렇게 열심히 나오시는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늦장을 부리고,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온 몸과 마음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재물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권력이나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도 축하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잠시의 기쁨은 주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믿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교회는 인류와 역사 앞에 잘못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임 교황이신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의 잘못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였고, 인류와 역사 앞에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교회를 믿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설령 교회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잘못된 판단을 따랐던 신앙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 주심을 믿습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통해서 조직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교회와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주의 기적 주장과 나주의 성모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광주 대교구는 신자들에게 나주와 관련된 곳에 가지 말라고 결정하였습니다. 설령 나주와 관련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교회의 결정에 순명한 신자들에게 하느님은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나주와 관련된 곳에 간 사람들이 나중에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이 드러날 경우 그 책임은 온전히 당사자들이 져야 합니다. 부활이 있다고 생각하고 일생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산 사람은 부활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입니다. 설령 부활이 없다고 해도 열심히 살았던 삶 자체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탕하게 살았던 사람은 부활이 있다면 너무나 큰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자명한 이치입니다.

성서에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은 2가지입니다. 첫째는 몸을 통해서 드러내는 믿음입니다. 이슬람 신자들은 매 정해진 시간, 하루에 5번씩 메카를 향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 모습은 경건하고, 진지합니다.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몸을 통해서 드리는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매일 새벽에 기도를 하셨고, 때를 맞추어 삼종기도를 하셨습니다. 밥을 풀 때도 성호경을 긋고 밥을 푸셨습니다. 이렇게 몸으로 드러내는 신앙은 자식들에게도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요즘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두 번째는 온 마음으로 응답하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주님의 한 말씀이면 죽었던 자신의 부하도 낳을 것이라는 백인대장의 믿음, 주님의 옷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 믿었던 여인, 주님의 자비로 눈을 뜰 것이라 믿었던 소경입니다. 자캐오는 이렇게 응답을 했습니다. ‘주님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이웃과 나누겠습니다.
 

댓글 2

  • 2012년 7월 22일 오전 6:22

    아~멘!!

  • 2012년 7월 22일 오후 6: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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