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두개의 문’이란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벌써 4년 전에 있었던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라고 합니다. 동창 신부가 도시빈민 위원회 위원장이었기 때문에 1년가량 용산참사 현장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많은 신부님들께서 현장에서 미사를 드렸고, 저도 몇 번 참석했습니다. 서울시와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가 합의를 보았고, 그곳은 이제 말끔히 철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세입자들과 피해자들의 가슴은 아직도 큰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영화는 저항하는 시민들의 눈이 아니라, 명령을 내린 경찰서장의 눈이 아니라, 정책을 집행하는 서울시 공무원의 눈이 아니라 명령에 따라서 법을 집행하던 경찰의 눈으로 바라본 영화라고 합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늘 소외받고, 내 쫓겨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입자들과 영세 상인들입니다. 그 일은 청계천 개발, 상계동 개발, 용산 개발을 통해서 계속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개발로 얻는 이익은 누구에게 집중되었는가를 보면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서울시는 앞으로는 무리한 철거는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주민들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재개발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건설사와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재개발보다는 주민들 모두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는 재개발을 하겠다고 합니다. 돈보다, 이익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몇몇 저축은행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고객들이 예치한 돈을 은행의 대표들이 마치 자기 돈인 것처럼 유용했습니다. 많은 돈을 예치한 사람들, 권력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사고가 나기 전에 미리 인출을 했습니다. 누가 피해자일까요? 수백억 원씩 돈을 빼돌린 대표들은 아닙니다. 은행의 비리와 부정을 알면서도 뇌물을 받고 눈을 감아준 금용 공무원도 아닙니다. 평생 일해서 받았던 퇴직금을 이자를 조금 더 준다는 은행에 넣어둔 사람입니다. 시장에서 일해서 번 돈을 넣었던 사람입니다. 자식의 장가 비용을 넣었던 사람입니다. 노후를 생각해서 돈을 넣었던 사람입니다. 가진 자에게는 작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목숨과 같은 돈입니다. 예금자 보호법에 넘어서는 돈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높은 이자를 준다고 해서 샀던 후순위 채권은 휴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누가 그들을 위로해 주고, 누가 그들의 돈을 찾아 줄 수 있습니까?
대기업은 망해가면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살려놓습니다. 영세한 사람, 힘없는 사람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온 몸으로 저항하는 세입자들에게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엄정하게 적용되는 법의 잣대가 권력자와 가진 자들 앞에서는 너무나 느슨해집니다. 며칠 전에 끝난 ‘추적자’라는 드라마는 허구이지만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고, 공평하지도 않다는 것을 새삼 알려주고 있습니다. 동네 가게에서 풀빵을 훔친 청년은 감옥에 가는데, 몇 백억 원씩 횡령한 재벌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곧 사면을 받습니다.
성서를 어떤 분들은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을 다스릴 사람을 당신의 모습을 닮도록 만드셨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은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선택하였고, 그로인해 죄와 죽음이 생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의 결과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때로는 직접 사람들을 고통과 절망에서 희망과 기쁨으로 인도하셨으며, 때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역사의 순간에 함께 한 사건이 모세를 통한 이집트의 탈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였습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틀을 벗어나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원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제물이 되셨고, 우리에게 성사를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표지인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표지입니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바로 하느님 백성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다른 의미로 ‘신비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의미입니다. 서로 다른 교회 모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한 몸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각 교회는 다른 교회를 위해서 도움을 주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몸이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고, 치료를 하듯이 신비체인 교회는 다른 교회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체인 교회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게 됩니다. 그로인해 가톨릭 사회교리가 생겼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연대성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를 통해서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를 위해서, 도시빈민을 위해서, 장애인을 위해서 교회가 함께 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한 몸을 이룬다는 신비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파스카’라는 말은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절망, 고통, 좌절, 슬픔에서 기쁨, 희망, 행복, 위로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파스카’는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는 파스카의 신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말씀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편에 계셨습니까? 낮아지지 않는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도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