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내일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고향을 찾는 모든 분들이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가는 길이 비록 멀고, 분주하겠지만 모두들 안전하게 잘 다녀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가족들이 모이면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약주를 드시면서 모처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곤 합니다. 모든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집안의 어른께서는 추석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세상을 떠나신 어른들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좋겠습니다.
어릴 때, 아버님께서 제게 바둑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둑은 창의성을 길러주고, 두뇌의 발전을 키워주는 좋은 게임입니다. 바둑에서 중요한 것은 ‘형세판단’입니다. 눈앞에 작은 것들에 집착하면 상대방의 바둑알은 취할 수 있겠지만 바둑에서는 패하기 마련입니다. 바둑은 상대방의 바둑알을 많이 얻는 게임이 아닙니다. 바둑은 상대방보다 집을 더 많이 얻는 게임입니다. 또한 바둑에서 중요한 것은 ‘수읽기’입니다. 처음 바둑을 배우는 사람은 바로 앞의 수만 보게 됩니다. 하지만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적어도 10수 이상의 앞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판의 바둑을 두기 위해서도 ‘형세판단과 수읽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눈앞에 있는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욕심을 부리고, 양심을 속이고, 친구를 배신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끝은 늘 추하고, 결국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가려운 곳을 긁으면 당장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상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미워하고, 똑같은 방법으로 되 갚아주는 것은 형평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주도록 조직화 되어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은 상대방이 벌을 받는 것을 보면서 보상을 받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는 두려움 때문에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죄를 벌하고, 잘못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장은 해결될 것 같지만 우리들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치유와 화해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진정한 치유와 화해를 이루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인생을 기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둑이라면 게임을 이길 수 있는 고도의 ‘형세판단과 수읽기’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제1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지금 당장은 억울하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인생의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용서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적당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0%만 용서한다. 50%만 용서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용서는 온전히 100% 용서여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미진한 마음으로 용서한다면 그것은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분노와 원망이 있기 때문에 기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내가 베푸는 선행이 아니라 어쩌면 용서는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은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용서하고 용서받을 때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