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주교의 묘비명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주교의 묘비명이라고 합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까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깨달았다.
만일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다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는지.“
나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먼저 변화되어주기를 요망합니다. 나 자신은 바꾸지 않으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원망을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며, 습관이 바뀌면 인생이 바뀝니다. 나를 먼저 바꿔보십시오. 나를 바꾼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대단한 것부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단한 것을 먼저 바꾸려하면 그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작고 쉬운 것부터 바꿔 간다면 그 결과는 하느님과 친구가 되는 영광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마땅을 쓸었습니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 나태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말보다 실천입니다. (마태 21, 28-31)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어떤 주교님의 묘비에 새긴 유언에서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삶을 통해서 그게 불가능 하다는 것을 터득했고,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역시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마지막 시도로 자신의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으나 그것마저도 달라지지 않아, 그는 죽음을 앞두고 생각에 잠깁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변화되었더라면 그것을 보고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이고, 그 여파로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라고, 우리들에게 남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자신부터 변화되라고 유언으로 남기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교님의 묘비명과는 달리 시인 나태주는 내가 살고 있는 마당을 쓸었더니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 졌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생각과 실천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성당에 나오시면서 성당 대문 앞이 다른 때 보다 깨끗하여 졌다고 느껴보지 않으셨나요? 저는 얼마 전부터 매일 성당에 들어가면서 성당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성당 대문 앞까지 걸어가면서 잡초를 한 두 포기씩 뽑고 들어갑니다. 그랬더니 늘 잡초로 우거져 있던 성당 앞이 깨끗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껏해야 하루에 풀 한포기를 뽑았을 뿐인데 성당 앞이 깨끗해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언젠가도 훈화에서 ‘나비의 효과’에 대하여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어느 한곳에서 일어난 작은 나비의 날개 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으로, 나태주 시인의 시(詩)처럼 내 집 앞마당만 쓸어도 지구의 한 모퉁이가 깨끗해지고 꽃 한 송이 피었는데도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나 하나쯤이야가, 나 하나 때문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상급평의회나 단장의 지시 활동에 대하여 실행을 하고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 성모님을 군사령관으로 모시고 있는 군인들입니다. 국가를 지키는 군인은 적을 죽이고 나라를 지켜야 하는, 네가 죽으면 내가 살고, 내가 죽으면 네가 사는, 죽느냐 사느냐의 사명을 띠고 있으나 성모님의 군사는 사람을 살리는 군대입니다. 너도 살고 나도 함께 사는,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가기위해 덕을 쌓는 곳입니다. 그 덕의 원천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자비와 사랑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루카 복음 10, 30-37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율법 교사가 만난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사회교리 문제를 내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는데,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듭니다. 마침 어떤 사제와 레위인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못 본채하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때마침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 36)하고 묻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사랑의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 39)입니다.
우리 모두 자비와 사랑을 함께 실천하도록 합시다. 내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내 이웃부터, 작은 사랑부터 실천하도록 합시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잘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등등 상대방에게 건네는 말부터 사랑을 담읍시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