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르코복음과 마태복음에도 비슷하게 나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마르코복음의 내용은 루가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의 내용은 약간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다.’(마태 12,30)
예수님의 말씀이 약간 변형된 것은 마태오 사도가 복음을 쓸 당시 공동체의 상황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만 하지 않으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유연한 사고방식입니다. 비록 나와 다르더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편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상당히 긴박한 경우입니다. 박해의 상황인 경우가 이와 비슷합니다. 확실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에게는 문을 열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의심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잘 모를 때입니다. 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의심을 통해서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합니다. 과학자들에게 의심과 회의는 필요한 연구 자세입니다. ‘왜’ 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과학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계속되는 행위의 반복입니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던 적이 있으면 지금은 바람을 피우지 않더라도, 늘 의심을 하게 됩니다. 도박도 비슷합니다. 한번 잘못한 적이 있는 사람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인권침해 논란이 있었던 ‘보호감호’가 이와 비슷합니다. 잘못을 했던 사람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범죄자의 ‘전자발찌’ 부착도 이와 비슷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인들에게도 자주 볼 수 있는 경우입니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사업에 실패를 하는 경우, 봉사를 많이 했는데 어느 날 건강이 나빠진 경우,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는데 대학 입학에서 떨어진 경우 등이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16년 전쯤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사목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저에 대해서 주교님께 말을 하였고, 저는 주교님을 만나서 주의를 받았습니다. 주교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의심을 하기 시작하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은 나와 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 화가 났습니다.
성당에 돌아와서 성경책을 보았는데, 오늘 제1독서의 내용이었습니다. ‘알몸으로 왔으니, 알몸으로 돌아 간다해도 감사 할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 다해도 감사할 뿐입니다.’ 욥은 가진 모든 것을 아무 이유 없이 잃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누구를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저는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고, 모든 것이 잘 풀렸습니다. 계속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분노하면서 지냈다면 저는 사제생활을 잘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제게 다가온 위기와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욥 성인의 말씀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