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울 지역 지도자 학교(전원 신부님 강의)

2010. 6. 18. 오전 5:58:38

글자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전원 신부님의 강의를 요약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성서를 통해서 정리해 주셨고, 참된 신앙인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은 부족하고,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하고, 주어지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함을 뜻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피부색, 혈액형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모든 생명들도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고, 세상을 떠나갑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생명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자유의지’입니다. 이 자유의지를 통해서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되었고, 하느님을 따를 수도, 하느님을 떠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삶은 참된 평화와 행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따르지 못하면 인간은 죄의 심연에 빠지게 되고, 죄의 결과는 고독과 슬픔과 고통입니다. 성서는 사람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서 먹었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단순이 과일을 먹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같아지려고 하는 것은 바로 교만이며, 이 교만의 결과는 비참함입니다.(카인의 죄, 바벨탑 사건, 노아의 홍수)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교만의 죄로 비참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다시금 하느님의 품으로 받아 주시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람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참된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오늘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몇 명의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참된 신앙인의 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12,2)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복의 씨앗이 되게 하고, 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부족하고, 겁도 많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불러 주셨고, 믿고 따르면 많은 복을 내리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데서 시작합니다. 사람의 능력이나, 업적이 아닙니다.

창세기 45장에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넘긴 형제들을 용서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려고 하느님께서 나를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의 오두막이 있습니다. ‘요셉에게 상처의 오두막은 형들의 학대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입니다. 또한 경비대장(포티파르) 아내의 모함입니다. 요셉은 그런 상처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상처의 오두막을 은총의 시간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상처의 오두막에 머무는 사람은 분노와 미움이 가득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만날 수 없고, 자신의 오두막에 갇혀서 살게 됩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떠올려서는 용서와 치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상처가 하느님의 이끄심,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는 치유해 주시고,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나무의 나이테는 매서운 겨울을 이겨냈다는 증표입니다. 나이테가 굵은 것은 그만큼 힘든 겨울을 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나무는 더 높이 자랄 수 있으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탈출기는 모세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기 3, 10)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 약속의 땅으로 가지 못했고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40년을 광야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생활을 했었고, 그 습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의 40년은 바로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벼를 심었다고 바로 추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신앙은 또한 기다림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기다렸지만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저것이 내가 주겠다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제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신명 34, 4)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고, 내가 주인공이 되는 것은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목적지에 들어가지 못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셨지만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聖王’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취했고, 충실한 부하였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나단 예언자는 다윗의 잘못을 비판하였고,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 했습니다.(2사무 12)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를 받아들였고, 하느님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편 51장은 다윗의 참회를 표현한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비록 왕이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다윗은 ‘성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가 진흥 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하시고,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하얗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영향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권위’에서 옵니다. 예전에는 권위가 힘과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권위는 ‘희생과 봉사’에서 옵니다. 희생과 봉사는 의무감에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희생과 봉사는 사랑이 충만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유의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자유의지가 사랑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역사는 성서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나의 삶에서도 그 구원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으며, 나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 앞에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면 내 삶은 구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댓글 1

  • 2010년 6월 18일 오후 1: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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