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3주간 토요일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는데 사무장님께서 다른 성당에서 보내온 바자회 티켓을 보여주었습니다. 액수는 ‘100’만원이었습니다. 순간 망설였습니다. 누가 보냈을까? 내가 아는 신부님인가? 얼마를 보내드려야 하나? 신부님의 이름을 보니, 신학교에서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후배 신부님이었습니다. 순간 또 생각하였습니다. 나와는 잘 알지 못하는 신부님이신데, 바자회 티켓을 보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또 망설였습니다. ‘그럼 보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2년 전에 저도 본당 바자회를 하면서 40명의 신부님들에게 티켓을 보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동창, 선배, 후배 신부님들이었습니다. 모두들 보내 드린 티켓을 받으시고, 본당으로 티켓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내주셨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보내 드린 티켓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내 주시기도 했습니다. 티켓을 보내 주신 신부님도 어쩌면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송금을 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누가 이 사람의 진정한 이웃입니까?’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내가 베풀어 준 것이 되돌아 올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것은 자선이기 보다는 일종의 투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자선은 되돌아 올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이웃은 나에게 유익함을 주고, 나를 좋아해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나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어도, 나에게 아픔을 준 적이 있어도 모두가 이웃입니다.
어제 보라매 병원엘 다녀왔습니다. 며칠 전에 무릎수술을 하신 자매님을 위한 봉성체였습니다. 자매님께서는 제가 바쁠 것 같아서 봉성체를 신청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구역장님을 통해서 입원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어제 찾아뵈었습니다. 자매님께서는 무척 좋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바쁘신데 이런 곳까지 오지 않으셔도 되요.’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들었던 선배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제는 외롭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바쁜 것이 큰 영광입니다. 고독과 번민 중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에게 지금 가난하고, 아프고, 외롭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바쁜 일은 없습니다.’
교회를 진단하는 사람들이 이런 걱정을 하곤 합니다. ‘교회의 문턱이 점점 높아집니다. 성전은 더욱 화려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성당에 오는 것이 힘들어 집니다. 사제들이 바쁘기는 한데 누구를 위해서 바쁜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연도엘 자주가고, 봉성체를 열심히 다니려고 하지만, 저 역시도 다른 일들 때문에 바쁜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지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바빴던 바리사이는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기도와 단식과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지금 가난한 이웃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누구인지 알고, 이웃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제 사순특강이 있었습니다. ‘가상칠언’이라는 주제로 전영준 신부님께서 좋은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이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이다. 어머니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목마르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겨드리나이다.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인이 우리들이 나가야 할 길을 말해 주었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신부님의 강의를 요약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학교만 졸업하면, 군대만 제대하면, 사제가 되면, 본당 신부가 되면 잘 할 수 있을 텐데!’지금 나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앞으로 이런 일들이 생기면 더 즐겁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생활할 때는 언제나 부족하고, 힘들고,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니 지금의 상황이 그리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생이지만, 군에서 생활하지만, 신학생이지만, 보좌신부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많다.’이런 생각으로 지내면 지금의 상황이 미래를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될 수 있고, 오늘 흘린 땀이 인생의 거름이 되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에게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결혼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십시오.’인물이 좋기 때문에, 직장이 좋기 때문에, 건강하기 때문에, 집안이 좋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건은 언제나 충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건을 보고 결혼을 하는 사람은 그 조건이 사라지면 실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하는 사람은 늘 미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얀 종이 위에 찍힌 검은 점을 보기 보다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여백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의 주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잘못을 하였지만 광야에서의 생활을 마치시고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둘째 아들은 방탕한 생활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오늘 들은 것처럼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잘못과 둘째 아들의 허물을 탓하지 않고 돌아온 그 아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줍니다. 그리고 오늘의 제 2독서는 왜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에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은 인사이동을 통해서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동료사제들 중에는 늘 불평과 불만이 있는 사제도 있습니다. “보좌 신부 때는 본당 주임신부를 잘 못 만나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본당 주임신부가 되어서는 보좌신부를 잘못 만나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보좌신부가 없는 곳에 가서는 모든 것을 혼자 하느라 힘들었다고 합니다. 신자가 적은 본당에 가서는 심심하다고 합니다. 신자가 많은 본당에 가서는 일이 많아서 죽겠다고 합니다.” 동료입장에서 참 안타깝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의 생각을 하는 동료도 있었습니다. “신설 본당에 가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어서 좋고, 시골 본당에 가면 모처럼 쉬면서 건강을 돌볼 수 있어서 좋고, 보좌 신부가 열성적이면 일을 맡길 수 있어서 좋고, 보좌 신부가 의욕이 적으면 내가 할 일이 많아서 좋고, 신자들이 많으면 함께 할 일이 많아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친구는 언제나 활력이 넘치고, 즐겁게 생활하는 것을 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에 속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어느 곳에 있던지 나의 마음이 나의 삶이 어떤 가치와 어떤 기준으로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고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이웃과 화해하지 못하면 내가 있는 삶의 자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으로 신음했던 이집트의 노예 생활과 고난의 삶을 살았던 광야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과 화해하고 나 자신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한다면 어느 곳에 있던지, 바로 그곳이 약속의 땅이 될 것이고 용서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모습을 오늘 복음의 ‘큰 아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자신의 동생과 화해하지 못하였고, 동생을 아버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큰 아들에게 아버지의 집마저도 약속의 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약속의 땅은 하늘나라는 장소와 거리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어도 약속의 땅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모든 것을 탕진하고 남의 집에 노예처럼 살며 굶주림에 지쳤지만 하느님과 화해하고, 자신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면서 약속의 땅을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살 때 바로 그곳이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둘째 아들처럼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시면 이제라도 훌훌 털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십시오. 큰 아들처럼 자신의 지위와 명예가 자신의 능력과 실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시면, 그러한 오만과 교만을 떨쳐버리고 겸손의 옷을 입도록 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사순절을 보다 뜻있게 보낼 수 있고 우리 모두는 새로운 삶, 부활의 삶에로 초대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