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 죽겠는데 왜? /송현 신부
위경(僞經)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전도 여행에 지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저 산으로 올라가도록 하자. 이유는 묻지 말고 가자. 커다란 돌을 두 개씩 들고 따라오너라.” 유다는 못마땅했습니다. ‘힘들어 죽겠는데 산에는 왜 올라가는 거야. 게다가 돌까지 들고서 말이야.’ 그는 투덜거리며 자갈 두 개를 주머니에 살짝 넣었습니다. 반면 우직한 베드로는 바윗돌 두 개를 양쪽 어깨에 둘러메고 묵묵히 쫓아갔습니다. 마침내 정상에 다다르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러 앉히셨습니다. 그러고는 “자, 이제 각자 가져온 돌을 앞에 놓고 기도하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후에 돌을 축복하자 그 돌이 빵으로 변했습니다. 모두들 놀라는 가운데 베드로는 큰 빵을 두 개나 얻어 신났습니다. 하지만 잔꾀를 부린 유다는 후회만 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알 수 없어 한숨이 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괴로워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에 배신감을 느끼며 한탄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대가가 기껏 이런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아픔이나 어려움도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목적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열심히 기도를 바치고 봉헌함으로써 현세의 고통을 없애고 부귀영화를 얻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미신행위에 불과합니다. 첫 그리스도인이셨던 성모님 역시 모든 것을 굳게 믿었으나 삶의 고통을 면하지 못하셨습니다. 꿈처럼 지나간 천사와의 만남, 처녀의 몸으로 한 임신, 요셉과의 말 못할 혼인과 출산, 힘겨운 이집트 피난을 거쳐,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헤매고 집을 떠나 방랑 설교자가 된 아들이 마침내 사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드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갖가지 모욕을 당하며 돌아가신 것을 보았을 때, 다른 모든 이의 믿음은 흔들렸지만 성모님은 그분이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단 한 번도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배신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인간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면 그것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묵묵히 따라갔습니다. 예화에서 베드로 사도가 두 개의 바윗돌을 묵묵히 지고 갔듯이 말입니다. 시련을 이겨낸 사람은 생명의 월계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천상 모후의 관을 쓰신 성모님 옆에서 우리도 천상 월계관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