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결실

2009. 12. 23. 오후 6: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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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결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 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제 3 장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와 평신도의 독실한 삶

5.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결실

그 후 300년 안에 "신심생활입문"은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지고, 여러 판이 출간되었다. 분명히 프란치스꼬는 교회에서 가장 민감하고도 중요한 부분을 다루었다. 많은 평신도 크리스챤들이 보다 확실하고, 깊고, 인격적이며 의미 있는 영성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향한 그들의 여정을 위해 관대하면서도 확고하고 긍정적이며 현실적인 안내를 살레시오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과 그의 훌륭한 인품 그리고 교회역사 내 영성의 전개 과정에서 그의 중요한 역할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그가 초기 사도적 영성의 출현인 13세기와 16세기 그리고 최근 출현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평신도시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크리스챤 전통의 풍요로움을 모두 지니고 있었지만, 특별히 그의 서문에는 자신이 교육받았던 이냐시오 전통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다음 세대에 또한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많은 영성 작가들이 일상 삶의 자리를 위해 제시된 그의 영성에 대해 문제점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크리스챤 영성의 여러 측면들, 즉, 마리아신심, 성체성사, 삼위일체 등을 강조 할 수는 있지만, 평신도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본적인 틀은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어떤 건실한 크리스챤 영성도 은총, 헌신, 인내, 건전한 지각 그리고 기쁨 가득한 희망을 요구한다. 최소한 이것들은 저자가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가 필로데아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요약하고자 할 때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물론 그의 구체적인 초점은 평신도의 삶이다. 그는 이러한 각각의 다섯 가지 요소가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은총은 근원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성화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일이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로 이끌고 계신다. 그분을 알고자하고 사랑하고자하는 열망은 오로지 그분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저자가 자주 저자의 영적 상담자들에게 이야기하듯이, 영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 마음 안에 현존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분명한 표징이다. 또한 그분은 그것을 완성하시려는 뜻이 없이 우리 안에 그러한 열망을 결코 불어넣으시지 않는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선하심과 지혜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한 강조는 특별히 많은 도전과 유혹들로 인해 불가능할 것같이 보이는(그러나 오직 그렇게 보이는) 평신도 삶에서 참된 미덕으로의 성장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은총은 이처럼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롭게 주님의 인도하심에 응답하여야 한다. 이때 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우리에게 특별히 좋은 안내자가 된다. 우리는 그의 책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주도에 응답을 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헌신과 인내는 본질적인 것이다. 독실한 삶을 살려고 열망하는 사람들은 살레시오가 주장하였듯이, 우선 시작을 잘하여야하고 또 잘 시작한 것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우리의 거룩함은 관대한 응답과 지속적인 충실함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예수 또한 그의 공생활에서 이것을 강조한다. 그가 부자청년에게 이야기하였을 때(마태오 19:16-22),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에서 그의 공생활 마지막 설교(24장, 25장)는 경계와 인내에 대한 일관된 권고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24:32-35), 충성스런 종(45-51),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25:1-13), 달란트의 비유(14-30), 양과 염소(31-46) 등 이 모두는 우리들의 부르심과 헌신에 대하여 "마지막까지" 충실하여야 한다는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한 비유들이다.

건전한 지각과 기쁨 가득한 희망은 독실한 삶을 사는데 있어 본질적인 균형을 제공한다. 예수의 부자청년과의 만남 후에, 제자들은 복음에 대한 부르심의 요구에 당황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마태오 19:23-24) 제자들은 이내 예수의 말씀에 함축된 참된 의미를 깨닫게된다. 우리 모두는 소유하고 있는 것에 그리고 실제적으로 우리의 헌신과 인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들을 소유하고자하는 열망에 집착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부유하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9:25-26)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에게 있어 두드러진 특징이었던 건전한 지각과 기쁨 가득한 희망을 가진 신앙의 기초이다. 우리는 거룩함을 추구하는데 있어 좌절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만 협력하고 응답하는 우리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느님의 몫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우리에게 어떤 기준을 내어 주고 뒤에서 그것을 행하는지 안 하는지 살피는 냉정한 공사감독처럼 생각해선 안될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그분 자신을 잇기 위해 지금도 죽음에 이르고 계신다. (아니,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이것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오로의 기쁨 가득한 희망의 근거이다.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로마서 8:31) 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바오로처럼 그것은 하느님 자신일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일 수도 없으며 또한 어떤 권력이나 힘일 수도 없음을, 다시 말해, 하늘에도 땅에도 또 땅 아래에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모든 위대한 지도자처럼 확고하면서도 온화한 영적지도자로 그리고 환희에 찬 희망의 예언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문명에 드러나지 않은 미개인들이 더 고결하다는 소박한 휴머니즘을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성은 단순히 타고나면서부터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죄는 인간의 맹목처럼 현실이다. 따라서 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좋은 지도자와 영적 수련과 같은 균형 잡힌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하느님은 여전히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이곳에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어두운 그리고 죄에 사로잡힌 칼뱅주의 그리고 가톨릭과 같은 계통인 얀센니즘이 살레시오의 위대한 작업이 있은 후대에도 계속해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기에 그는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다음 장에서 보듯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육화적 낙관주의는 입증되고 교의화 된다. 그리고 그의 시대에는 깨닫는 것이 아마도 가능하지 않았던 것 중에 하나인 중요한 공동체 차원이 더해지게 된다.

[계속]
 

댓글 1

  • 2009년 12월 26일 오후 4:05

    모니카 자매님! 지난 1년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좋은 자료들 활용 잘하고 있습니다.고맙고 감사 했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좋은자료 계속 부탁 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