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16

2009. 12. 17. 오후 7: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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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16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 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제 2 장 사도적 영성의 두 가지 고전적 모델

4. 다른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음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영성의 획기적인 약진이 있을 때마다 늘 새로운 문제점이 발견되곤 한다. 토마스 이후 몇 세기 동안 발생한 문제점은 혼합된 생활에서 활동과 관상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여전히 관상이 중심이 되고 있다. 탁발승들의 사도적 투신인 활동은 기도의 드러난 결과이었으며, 그 가치를 기도와 연계하여 끌어내었다. 탁발승 또한 본질적으로는 그들 고유의 영성에 따라 정주적이었다. 신비가인 Rhineland 그리고 Tauler, Henry Suso, Ruysbroeck 등과 같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들의 이상은 본질적으로 관상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또 다른 관상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대부분은 행동을 강조하는 쪽으로 택하게 된다. 16세기초 마틴 루터가 아우구스띠노회 회원이 될 무렵, 상대적으로 그의 탁발승 형제들은 프란치스꼬와 도미니꼬, 토마스와 보나벤뚜라에 의해 활력을 불어넣었던 기도의 영성을 거의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16세기초 종교생활의 위기는 비극적인 결과를 나았다. 그리스도의 하나의 지체는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나뉘게 되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분열은 계속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의 비극은 거부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우리는 앞선 교회의 역사에서 보듯이 이러한 16세기초의 비극은 또한 획기적인 약진을 불러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개신교의 개혁은 성서의 새로운 인식을 이끌었고, 우리들에게 성서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어넣었다. 그리고 트렌트 공의회에 의해 시작된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운동은 오히려 가톨릭 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돋우는 신앙생활로 우리를 이끌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은 16세기의 종교적 위기가 우리 크리스챤 생활에서 복음의 영성에 대한 교회의 이해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13세기에서처럼 이러한 혁신은 거의 동시적으로 몇몇 사람들에 의해 일어났다. 성 안젤라 메리키가 세운 우르술라회, 성 필립보 네리가 세운 오라토리오회, 성 Cajetan 그리고 Caraffa 추기경(후에 교황 바오로 4세가 됨)이 세운 Theatines 그리고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예수회가 있다. 이들 창설자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그들을 하나도 연결시켜 주는 새로운 비전은 무엇인가? 이냐시오는 이 새로운 비전의 본질을 꾀 뚫고 있었다. 그는 그의 회원들에게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라(Finding God in all things)"고 권고하고 있다. 그의 가까운 동료는 이상적인 이냐시오의 사도직을 "활동 중 관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새롭게 제안된 사도적 이상은 더 이상 부분적으로 관상적이거나 또는 부분적으로 활동적인 생활 방식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은 주지 할만 한다. 우리는 이냐시오가 성당 안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찾음으로 해서 양편을 가르고 있는 벽을 무너뜨리는 제안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이것을 실현한다면, 이러한 이상은 형식을 갖춘 기도 안에서는 물론 우리가 하는 일 안에서도 항상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 예수회 시인 Gerard Manley Hopkins의 말처럼 이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에 설립된 완전한 의미에서의 사도적 공동체는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음"의 이상을 견지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 중에 만났던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또한 우리는 그들로부터 그들이 만난 그리스도를 나누어 받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의 이 세상 안에 참으로 현존하고 계신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하늘에서 그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찾는 것이다.

이냐시오와 다른 사도적 공동체의 창설자들은 세상에 대한 성서의 양립된 이해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들의 삶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과 "속세의, 육적인 그리고 악신의" 음성을 함께 들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충실한 기도와 오랜 연습에 의해서만 배울 수 있는 분별이 이냐시오의 사도적 비전과 양성에 있어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음성을 우리를 그 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유혹의 음성으로부터 구별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분별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을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운 긍정적인 측면을 찾게 된다. 그것은 세상은 더 이상 우리가 하느님을 옮겨야할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다는 것이다. 그 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캐오는 그의 작은 형체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보기 위해 더 이상 나무 위로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는 이제 바로 그의 일상의 삶 안에서 두발을 땅에 디딘체 주님을 보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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