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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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 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제 2 장 사도적 영성의 두 가지 고전적 모델 3. 혼합된 삶의 영성 13세기초는 크리스챤 영성의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모든 시대를 통해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었던 시기가 바로 그 때이다. 우리는 그가 도미니꼬가 세상을 떠난지 몇 년 후에 태어났기에 그를 2세대 도미니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토마스와 그의 프란치스꼬회 친구이자 동료 신학자인 성 보나벤뚜라는 탁발수도승의 삶에 대한 신학을 잘 정리하였다. 토마스는 그것을 활동과 관상의 혼합된 형식의 삶이라고 말하였으며, 그것은 순수한 관상보다 보다 높은 삶의 형태라고 말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높고 낮거나 또는 상위이거나 하위이거나 하는 삶의 계급적 방식에 대한 중세의 애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토마스의 이야기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이것은 예수를 따르는 가장 완전한 길로 생각했던 관상이나 정주 또는 은둔의 삶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세상이 누군가 참으로 거룩함을 갈망한다면 포기하거나 떠나야만 하는 그리고 크리스챤의 완전함에 이르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 아님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또한 토마스는 "단지 빛을 발하는 것보다는 비추는 것이 좋은 것과 같이, 단지 관상하기보다는 관상한 것을 전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신학대전에서의 언급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도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그 기도의 열매를 나누는 사람은 마치 그의 빛을 다른 이들에게 비추는 촛불이나 램프와 같았으며, 단지 고독한 광채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영성에서 사도적 삶은 관상의 나눔이었다. 먼저 성당에 가서 이른바 하느님으로 채우고 그리고 삶의 자리로 가서 그가 기도 중에 만났던 하느님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토마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예를 들 수 있다. 복음에서 예수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혼자 가곤 하셨다.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루가 4:42; 6:12; 9:10 그리고 특별히 그의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의 40일 (루가 4:42) 또한 그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그를 강하게 하였던 올리브 산에서의 고뇌 (루가 22:39-46)에서 볼 수 있다. 예수의 삶에서 기도만이 중요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바로 행동과 연계되었다. 그에게는 그리고 그의 참된 제자들에게는 기도는 세상을 떠나 자신 안으로만 향하는 "중심을 응시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행동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살아가는 것과 연계되어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 성녀 같은 분들도 모두 봉쇄적 관상 생활을 지냈지만 본질적인 연계를 깊게 깨닫고 있었다. 우리 시대 역시 복음에 강하게 뿌리를 둔 어느 카리스마적인 기도 단체도 그들의 시대를 향하여 깊은 인식을 갖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