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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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 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제 2 장 사도적 영성의 두 가지 고전적 모델 2.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탁발 수도승의 출현 지금까지 교회의 첫 천년을 조사하면서 우리가 분명하게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은 참으로 천천히 일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기껏해야 7,80년으로 제한된 인간의 행동과 삶과는 다른 시간 개념을 갖고 계신 듯이 보인다. 진화이론이 우리에게 말해주듯이, 우리의 이 세상이 이미 몇 십 억 년의 전개과정이 있어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께서 창조의 순간까지 다다르기 위해서, 특히, 창조의 최고의 순간인 인간을 창조하시기까지 상상할 수도 없이 긴 시간을 취하신 듯이 보인다. 따라서 복음의 참된 사도적 의미가 교회 내에서 천천히 드러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전개과정의 또 다른 의미는 이것이 현재의 우리를 성찰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지난 교회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어떤 새로운 획기적인 약진이 있을 때마다 몇몇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듯이 보인다. 특히, 시간과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변화된 환경과 필요에 대한 새로운 답은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있어왔다. 바로 우리의 역사가 그러하였다. 베네딕도회가 성 베네딕도의 수도회 이상으로 돌아가면서, 중세 사회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도시화, 단순한 물물교환이 아닌 화폐경제의 발달, 유럽의 새로운 국가와 다양한 국제어의 출현, 권위 있는 대학의 첫 설립, 크리스챤 신앙의 성지를 되찾기 위한 결국 실패한 십자군 전쟁,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바로 교회에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도전의 중심이 되는 질문 중에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만일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베네딕도회의 적절한 카리스마가 아니라면, 이 일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일까? 12세기 후반과 13세기초에 우리에게 탁발(托鉢,구걸) 수도회로 알려진 프란치스꼬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띠노회 그리고 갈멜회가 출현하게 된다. 갈멜회는 십자군전쟁의 실패로 인해 팔레스타인에 있는 갈멜산의 벽지에서 프랑스에 있는 피난처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의미로 본다면 일반적인 걸인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주 수도회의 안정되고 자급자족적인 생활에 반하여, 그들은 어떤 단체나 자급자족의 농경경제의 생활에 메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의 천 번째 전교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은 그들 카리스마의 기본이 되었다.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루가 10:3-5,7) 탁발 수도회의 가장 유명한 설립자는 성 프란치스꼬와 도미니꼬이다. 그들은 서로 알고 지냈으며, 1220년대에 각각 몇 년의 간격으로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기질면에서 완전히 달랐다. (도미니꼬가 서로 힘을 합쳐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자는 제안을 프란치스꼬가 거절한 것처럼 프란치스꼬는 이 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미니꼬와 같이 현실적인 창시자에게는 한가지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와 프란치스꼬의 운동이 본질적으로 비슷하며 또 그들 시대의 징표에 대해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응답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주(定住)가 아니라 사도적이었다. 그들의 카리스마는 바로 다른 사람들과 그들 자신이 삶을 통해 얻은 하느님과의 체험을 나누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의 생활에서 관상적(정주) 요소와 사도적(활동) 요소를 혼합하려는 시도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두 요소를 함께 하고자하는 첫 번째 시도였으며, 그 열매는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다. 도미니꼬나 프란치스꼬 그리고 그들의 비전을 함께 하는 다른 창설자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관상과 사도적 카리스마에 의해 형성된 많은 단체들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