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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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 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들어가며: 평신도의 시대] 5. 세 가지 잘못된 생각들 우리는 왜 평신도의 시대가 교회 내에서 그렇게 늦게 찾아왔는지 그 답을 크리스챤 영성의 전개 과정을 살펴봄(이 책의 2부)으로 해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깊은 성찰을 통해 교회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몇 가지 잘못된 생각들이 늘 교회 내에 있어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지난 경험을 통하여 발견된 잘못된 생각들을 제거함으로 해서 우리를 보다 잘 정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신도 영성의 장애물로서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잘못 알고있는 세 가지는 무엇일까? 그 첫 번째 잘못된 생각에 관하여는 이미 앞서 언급하였듯이, 거룩함이 오로지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에만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 교회는 결코 이것을 믿지 않았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분명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생각이 반은 진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일반 평신도들이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거룩함을 찾는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도자의 삶보다 더 어렵다고도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수도서원을 하고 봉쇄생활을 함으로 해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깨끗하게 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수도생활이나 평신도생활이나 각기 장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독신은 자기자신을 주님의 일에 투신하는데 자유로우며,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일일 수 있다. (참조: 1고린토 7:32-34) 이것은 실로 독신 생활에서 오는 큰 장점이다. 그러나 독신생활을 통해 저절로 축복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결혼하지 않음으로 해서 주님을 즐겁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자기자신을 위해 보다 편하고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삶을 만드는데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결혼한 사람은 그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마음이 흩어지기보다는 오히려 화목한 결혼생활을 위하여 요구되어지는 여러 희생들을 통하여 스스로를 정화시킬 수 있다. 독신자들하고는 달리 결혼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책임을 맡게 되고, 또한 가족간의 관계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신실하심을 성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저자를 화나게 하는 동료를 만나거나 공동체의 상황이 저자를 불편하게 만들면, 저자는 저자의 방으로 가서 문을 닫고 그 동료나 상황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결혼을 하였다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바로 방안에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는 그의 독신에 관한 가르침에서 이러한 두 가지 삶의 장단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백하는 것이 있다. "미혼 남녀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나에게 지시하신 바가 없으므로 내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므로 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1 고린토 7:25) 그는 스스로 독신으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독신에 대한 아름다움과 장점에 대해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좋은 것이 모든 이들에게 좋은 것이라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았다. 신실한 크리스챤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평신도들을 방해하고 있는 또 다른 잘못된 생각은, 평신도들이 온전히 투신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 세상은 타락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참된 크리스챤 영성과도 반대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기 크리스챤들에게나 신약성서 작가들에게서도 큰 문제였다. 예수님 자신이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세상은 너희를 한 집안 식구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 15:18-19) 또한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 드렸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세상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세상은 이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 17:9,14) 어떤 의미에서 세상은 하느님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 같고, 예수께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는 '세상'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한가지 의미만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은 본래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물질적인 특성이나 인간관계들은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성장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생각은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여전히 사막이나 수도원으로 떠나고자하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그들의 영혼을 구할 수 없다고 잘못 믿고 있기 때문이다. 졸업생들은 학생이었을 때 오히려 크리스챤으로서 봉헌된 삶을 더 잘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세상이라는 경쟁사회는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참된 가치를 인식하지도 못할뿐더러 심지어는 그 가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저자는 세상 한복판에 있는 삶의 자리에서 참된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학교와 같이 온실 같은 환경보다는 훨씬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또 젊은 수도자가 상대적으로 보호된 수련원을 떠나 세상 한 가운데 있는 사도직 현장으로 파견될 때 느끼는 긴장감과도 유사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게되는 어려움들은 삶의 자리로부터 도피하라는 아니면 우리를 절망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부르심인가? 아니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숙되고, 우리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한 도전인가? 예수님의 답은 언제나 후자이다. 그분은 아버지께 청한다.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 주시는 일입니다." (요한 17:15) 오히려 세상의 그 도전들은 평신도로 살아가면서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 노력하는 사람들을 더욱 거룩하게 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세 번째 잘못된 생각은 종종 봉헌된 삶을 살려는 평신도 크리스챤들을 의기소침하게 할 수 있다. 그들은 신앙과 사랑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좋은 안내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안내자를 찾는 다는 것이 평신도에게는 어려운 반면, 수도자나 성직자들은 그들의 영적지도를 위해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또한 두 가지 이유에서 반 진실이다. 첫째로, 수도자나 성직자 또한 좋은 영적지도를 찾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불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평신도가 영적지도를 받는 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시면서, 부르심을 깨닫는 방법을 제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만일 그분께서 그 열망을 주셨다면 그분은 틀림없이 그 열망의 완성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이러한 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선하심을 거부하는 것이다.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