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안에서 하느님

2009. 11. 30. 오후 9:06:18

글자
1.당신이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제가 당신을 "파악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받은 사람들입니다.
세례 때 하느님은
단지 생각과 이론으로,
경건한 분위기와 느낌으로만이 아니라
그분이 당신 종들을 통해 우리에게 행하였던
바로 그러한 그분 힘의 육적인 행위로
우리를 사로잡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요, 신뢰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 삶의 처음 날들에
전례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말씀을 통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분 사랑의 영을 우리 마음에 쏟아 부우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명백한 증거는
고단함과 나약함 그리고 쓰라린 공허 속의
우리 마음의 불명료한 증거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세례 때에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 내 영이 머무는 성전(聖殿)이다.
이 말씀을 거슬러,
우리가 하느님과 성령을 떠나있는 가련한 피조물처럼 느껴지는
우리 일상체험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하느님을 더 믿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달콤한 영이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계십니다.
아마도 우리의 사소한 심리학같은 것으로는
스스로 도달하지 못하는 그곳에.
거기서 영은 영원한 하느님께 말합니다: 아빠 아버지.
거기서 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이야, 끝없는 사랑으로 진정 사랑받는 아이야.
우리는 세례받은 사람들입니다.

Karl Rahner(칼 라너)의 "Worte glaeubiger Erfahrung"(신앙체험의 말씀들) 에서


2.우리 싦의 위대한 행위 -우리 자신을 받아 들이는 것-

자비란 하느님이 인간을 현존으로 부르는 것,
은총이고 사랑이며 호의고 말할 수 없는 연민이다.
이것은 그토록 당연한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삶과 우리 운명을,
이 시간과 영원을 향한 우리의 부름을
그렇게 거리낌없이 자비로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자비를 베푼 것을
찬미하고 감사드릴 수 있는 자비로서 느끼는가?

사실 그렇다.
그분이 우리를 현존으로 부르셨으며 그것은 영원한 현존이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 은총으로 부르셨고
이 은총이 바로 그분이며 그의 영원한 삶이다.
우리가 또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이러한 존재,
그 뒤에는 텅빈 무(無)가 있는 이러한 영원,
은총과 영광 안에서 영에게 주어져 있는,
하느님과 함께 하며 하느님 앞에 있는 이러한 삶.
그것이 자비이다.
그것이 하느님 당신의 축복이기에;
그리고 우리의 현존에 의문을 갖게 만드는 우리 삶의 다른 모든 것들은
그냥 지나가는 것이고 임시적이며 연습이고 시험일 뿐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거기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이다.
하나의 신비인 이 삶을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고
하루 하루 새롭게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 마음의 온 힘과 모든 용기를 모아 기쁘게 말하자:
그것이 자비이다!

Karl Rahner의 "Worte glaeubiger Erfahrung"(신앙 체험의 말씀들)에서

3.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

첫 계명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다.
온 마음으로, 온 영혼과 심정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
이 사랑은 우리 자신의 마음, 가장 내적이고 최종적인 것, 우리 자신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린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더 기꺼이 드린다;
모든 것은 측정될 수 있고 채워질 수 있으나 마음만은 그렇지 못하다.
이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께 드려야 한다. 영원히, 끝없이.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분을 연인으로, 가깝고 신뢰할 수 있는 이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의 마음과 그분 자신의 영원한 사랑을 주시면서
우리 사랑을 요구하는 그런 분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혹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단지
가장 비인격적으로 생각되어진 최고의 세계연대(聯隊),
즉 사람들이 존중하고 갈등에 빠져서는 안되며
기본적으로 명령의 수행을 통해서만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세계연대를 가리키는 이름일 뿐인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랑이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생기없고 피곤하다.
우리 마음은 일상사로 소모되어 있고 하느님은 그렇게 멀리 계시다.
그렇게 우리 마음은 눈멀고 마비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사랑할 수 없다고 느낀다.
우리 마음에 사랑이 독려되어지면 마음은 벙어리가 되어 움직임이 없이 완고하게 있고
"선한 의지"조차 마음에 사랑을 요구하기엔 무기력해 보인다.
아니, 우리 자신으로부터는 우리는 이 사랑을 갖지 못한다.
우리에게 그 사랑을 요구하는 이만이 그 사랑을 줄 수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최소한 이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려 한다.
첫 계명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라면
첫 기도는 이 사랑에 대한 청원일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분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이 사랑을 쏟아 부어야 하기에.
성령이 이 사랑의 생명과 빛 그리고 사랑의 힘을 주어야 하기에.

하느님 맞은 편에서의 우리 사랑의 부재에 대한 겸손한 놀라움이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우리 사랑의 시작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청원하는 기도,
하느님을 거스르는 우리 마음의,
동의하지 않는 숨겨진 거역의지에 대항하는 기도가
하느님 사랑을 위한 우.리.의. 시작이다.
하느님은 그런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것을 우리에게 그분의 가장 실제적인 말씀 속에서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보다 그분을 더 믿어야 한다:
사랑을 청하며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은 사랑하고 있다.
우리가 모든 계명 중의 첫 계명을 여전히 그렇게 미미하게밖에는 지키고 있지 못함을,
가련한 마음이 괴로와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할 때조차도 그러하다.

Karl Rahner의 "Worte glaeubiger Erfahrung"에서

4.일상과 평범한 것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
그러나 삶의 축(제)일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분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도로 차지하려고
오직 고귀한 것만을 창조하진 않으셨다.
그분은 작은 것, 초라한 것,
그리고 우리 삶을 채우며 늘 되풀이되는 것들도 또한 원하셨다.

우리가 높은 대성당을 가득 메우거나
혹은 신비로운 미사가 비밀스런 화려함과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질 때에만
우리가 하느님의 종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들판과 작업장에서, 식탁과 침실에서도,
그리고 책상 뒤와 빨래통 앞에서도 또한 그분의 종이고 하녀이다.
이 모든 것들도 그분 이름에 영예와 찬미가 된다.

Karl Rahner의 "Worte glaeubiger Erfahrung"에서

5.인내 속에 내 형제들의 영혼을 껴안는다

그리스도인의 평균적인 삶을 바라보면, 그리스도인의 통상적인 도덕의식 속에선
이웃에게 아무런 악한 짓을 하지 않고, 이웃이 정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요구사항들을 들어주면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표상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이웃사랑의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의 일치 속에서 이기주의의 타파를 요구하며
또한 이웃사랑은 기본적으로는 단지 상호 요구의 합리적인 조정일 뿐이며
합의하에 주고 받음만을 요구한다는 생각의 극복을 요청한다.
현실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이웃사랑은
더 이상 계산하지 않고 보상없이 사랑하려는 각오가 승리하는 곳에서,
또한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받아들여지는 곳에서 비로소
그것의 진정한 본질에 도달한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일치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이웃사랑은 제한되어 있고 조정가능한 행위에 대한 부분적인 요구의 위치로부터
전면적인 생활실천의 위상으로 옮겨간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전체로서 온전히 요구되어지고 또한 과하게 요구되기
도 하지만
오직 그렇게만 최고의 자유, 자기로부터의 해방을 획득하게 된다.

Karl Rahner의 <Worte glaeubiger Erfahrung> 에서

6.당신 기도의 가치를 인식하십시오.

기도는 선한 의지의 일이다.
연습받고 시도되어 있으려고 하는 기술이다.
사람들은 기도 전에 마음을 모으는 법,
내적으로 고요해지는 법,
그리고 그들이 하려고 하는 바, 그들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들어올리는 것에 대해
숙고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사람들은 일정한 기도문이 없이
자신의 어려움과 삶, 자기 자신, 그리고 바로 하느님 그분과 관계가 있는
자신의 감추어진 거역의지에 대해 하느님과 얘기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또 자신의 의무에 대해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의 기분, 세상과 세상의 고난,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바로 하느님, 그분에 대해서도 그분과 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분은 그렇게 위대하고 멀리 있으며 그렇게 불가해하고 놀라운 분이라고.
그분은 진리이고 우리는 거짓이며 그분은 사랑이고 우리는 그리움이라고,
그분은 생명이고 우리는 죽음이며 그분은 충만이고 우리는 동경이라고.
사람들은 또 몸의 이완된 자세를 취하는 것,
내적으로 고요해지는 것,
먼저 떠오르는 일상적인 생각과 먼저 느껴지는 일상적인 분위기를
고요히 가라앉히는 것을 배울 수가 있다.
그리하여 스스로 한번이라도 자기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일상 안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기다리며 차례가 올 때까지 줄서 있어야 하는 죽음과 같은 순간들을
기도를 통해 성스럽게 하는 법을 사람들은 배울 수가 있다.
또 사람들은, 하루동안의 이런 저런 분노와 사소한 기쁨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법을 배울 수 있다.

Karl Rahner의 <Worte glaeubiger Erfahrung>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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