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8

2009. 12. 9. 오후 4:4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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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8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 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제 1 장 "세상"으로 돌아오다

2. 근본적인 문제: 세상은 선(善)인가 악(惡)인가?

평신도 영성의 전개과정에서 중심이 되는 가장 큰 문제는 봉헌된 크리스챤으로서의 삶과 세상의 관계일 것이다. 복음조차 창조된 물질의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상반되듯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에게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 신앙의 시금석은 언제나 성서이기에 그 주제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세상은 우주론적이고 신학적인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것은 창조된 우주이며, 창세기에서 "보시니 좋았던"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창조된 물질의 세계이다. 그러나 신학적인 의미에서, 세상은 "구원이 진행되는 장(場)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장(場)일뿐만이 아니라 또한 드라마의 배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타락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대시되는 바로 인류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셨기에 죄는 세상에 들어올 수 있었고 죄인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까지도 타락시킬 수 있었다. 앞으로 3장에서 언급하듯이 창세기의 작가는 죄의 전염성을 잘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아담과 이브의 죄 때문에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땅을 가꾸어야했고, 여자는 아기를 산출하면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투쟁과 고통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상징으로,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은 죄의 침투로 인해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유롭지 않다면,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오로지 자유롭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사랑하는데 자유롭다면, 사랑을 거부하는 것 또한 자유로울 것이다. 선(善)을 행하는 자유는 필연적으로 악(惡)을 행하는 자유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세상에 대한 애매함과 심지어 상반되는 점들은 이러한 신학적인 의미에서 오게된다. 물질적인 창조로서 세상은 오로지 선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선이신 하느님의 창조의 손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하고 그리하여 구원이 필요한 세상으로 생각할 때, 세상은 그의 구원을 위한 사랑을 여전히 거부하며 예수에게 반대하게 된다. 그는 세상에 왔지만 그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요한 8:23) 실로,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6-17) 종종 요한 복음은 이러한 하느님과 세상의 사랑과 미움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바오로의 편지 역시 이러한 상반된 점을 드러낸다. 예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그 자신을 세상과 화해시키셨다." (2 고린토 5:19)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골로사이의 신자들에게 바오로는 묻는다. "왜 당신은 아직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생활하십니까?" (골로사이 2:20) 그는 또 고린토인들에게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1 고린토 7:31)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신약성서의 긴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은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되듯이 우리는 예수와 바오로 그리고 다른 신약성서 작가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세상에 대한 일관된 신앙의 비전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태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거부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교회는 이러한 복음의 비전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선언까지 참으로 긴 여정을 갖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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