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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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 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제 1 장 "세상"으로 돌아오다 4. 고귀한 희생: 세상을 떠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상의 종말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급한 상황은 아닌 듯이 보였다. 그리고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도 신앙이 점차 받아들여지고 존중되어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믿는 이들에게 순교의 위험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사실 크리스챤은 이제 1세기 후 로마에서처럼 오히려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안정된 상황은 알렉산드리아의 크리스챤들에게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였고, 전교를 통해 많은 이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평온과 성공이 곧 그들 자신에게 문제점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George Lane, S.J.는 이것을 간략하게 잘 설명하였다. "이제 순교와 박해의 시대가 끝나자, 사람들은 어떻게 완전한 크리스챤의 덕목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순교는 그들에게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회에서 더 이상의 순교는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또 다른 이상을 찾아야만 했다." 이제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복음의 완벽에 이르는 이상은 무엇인가? 교회는 알렉산드리아를 변화시켰는가 아니면 알렉산드리아가 교회를 변화시켰는가? 봉헌된 영혼들에게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지자, 많은 생명력과 열정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세상에 의해 변질될 것과 같은 위험에 놓여있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똑같은 위험이 필리핀과 같이 대부분 크리스챤인 가톨릭인 국가에도 오늘날 현존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도전 받지 않는다면 신앙이 참으로 강해질 수 있을까? 만일 교회와 주변 상황이 너무 안정적이고 서로 아무런 긴장 없이 함께 하고있다면, 우리의 미온적인 상황과 복음의 가르침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은둔생활을 통해 그들의 구원을 찾았다. 즉, 그들은 교회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는 숨막히는 도시로부터 탈출하였다. 세상을 포기하고 광야로 떠남으로 해서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에게 이렇듯 세상을 떠나는 것은 순교를 대신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세속으로부터 그리고 특별히 바로 교회 안에 현존하는 모든 유혹과 함정으로부터 떠남으로 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순교의 영웅적인 죽음을 자신들의 생활 안에서 상징적으로 재생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초기 은둔생활에 강한 인상을 받곤 한다. 그들은 Lane의 표현대로 그들의 "매혹적인 열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성은 다소 엘리트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의 불교에서처럼 은둔생활은 극히 소수에게나 가능한 거룩함의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통해 세속은 인간의 마음을 얽히게 하고 거룩함으로 우리가 성장하는데 방해가 되는 집착의 근원으로 하느님의 계획과는 반대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것과 연관되어 그들은 인간의 영은 보다 높은 참된 아(我)로서 낮은 육체의 본성과 대립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 육체는 늘 인간의 성스러운 열정의 장애물이었기에, 인간은 참된 아(我)를 가두어 놓은 육체로부터 탈출하여야만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사막과 그 영성은 성 안토니와 같은 많은 위대한 인물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일반적인 우리 인간들의 일처럼 그 자체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이 선포한 "거룩함으로의 보편적인 부르심"에서 한 발자국 뒤로 퇴보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만일 복음의 가르침이 바로 이러한 것들을 요구했다면, 사막의 이상은 모든 이가 아닌 극소수에게만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사막은 완전한 크리스챤의 삶으로서 엘리트 비전을 제안하는 경향이 있다. 즉, 매우 소수의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또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그런 급격한 방법으로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조차 그 자신의 삶 안에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마태오 11:16-19, 여기서 그는 그의 삶의 방식을 세례자 요한의 혹독한 방법과 대조시킨다) 그러나, 당시는 완전한 포기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온전한 길이라고 생각하며, 그 길은 오로지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오늘날 봉쇄생활을 하는 수도자들만이 완전한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과도 같다.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