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9일 사순 제1주일

2014. 3. 12. 오후 3:07:52

글자

2014년 3월 9일 사순 제1주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오 4,1-1)

 

Jesus said to him,
“Get away, Satan!
It is written:
The Lord, your God, shall you worship
and him alone shall you serve.

 

말씀의 초대

 창세기는 사람의 창조와 원조들의 죄에 대하여 알려 준다. 여자는 뱀의 유혹에 빠져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준다.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느님께서 이르셨던 그 열매이다. 아담과 하와는 알몸임을 깨닫고 자기들의 몸을 가린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죄가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왔고 또한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은혜가 충만히 내리고 모두가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는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빵에 대한 유혹, 하느님을 떠보려는 유혹, 세상의 권세에 대한 유혹을 모두 물리치시자 악마는 떠나간다(복음).

☆☆☆

오늘의 묵상

 

 소비 사회를 사는 즐거움의 하나를 말하자면 무엇보다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이겠습니다. 여행지를 선택하는 데나 상품을 사는 데 요즘처럼 선택의 여지가 많은 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선택의 폭은 처음에는 행복감을 주지만 자칫하면 오히려 삶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이 이른바 '선택의 역설'입니다.
'행복'을 다룬 최근의 여러 책을 보면, 이러한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한 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겪는 커다란 어려움과 불만족의 큰 이유를 설명하곤 합니다. 스위스 출신의 유명한 경영인이자 문학가인 롤프 도벨리는 그의 책 『스마트한 생각들』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렇게 비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요구르트는 세 종류, 텔레비전 채널은 세 개, 교회는 두 군데, 치즈는 두 종류(신선하거나 혹은 부드럽거나), 생선은 송어 한 종류, 전화기는 스위스 우편국에서 연결해 주는 한 종류가 전부였다. 다이얼이 부착된 검은 전화 상자는 전화를 할 때 외에는 쓸 수 있는 기능이 없었으며, 그 당시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휴대 전화 가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수많은 종류의 휴대 전화 모델들과 전화 요금제라는 홍수에 빠져 익사할 지경이다."
선택의 역설 앞에서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은 이중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너무 많다 보니 선택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선택한 뒤에도 그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선택한 것에 기웃거리며 선망과 질시, 또는 우월감 같은 건강하지 못한 감정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다양한 상품들 속에서 사람들은 삶의 자연스러운 기쁨보다는 신경증을 얻을 뿐입니다.
선택의 역설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삶의 본질적인 것에 뿌리내릴 때 비로소 그 외의 다양한 것들을 행복한 삶을 위하여 지혜롭게 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유혹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마음속에 늘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비 사회 속에서 신기루 같은 이루 셀 수조차 없이 많고 끊임없이 증식되는 욕망의 대상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결코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듯이, 가장 중요한 기준인 주님과 복음에 뿌리내린 삶을 먼저 선택하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유 혹

-박진우 신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이 되면 신학교에서 아침을 주지 않는다. 금식이기에 우유 하나가 전부
였다. 점심때까지 기다리기엔 배가 너무 고파 살짝 간식이라도 먹어 볼까, 아니면 그냥 참아? 하
면서 순간 고민을 했었다. 그래도 오늘은 안 되지…하면서 참았던 기억이 난다. 한 끼 굶는 것이
사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아침을 거른 후 점심은 특별한(?) 맛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사제로 살면서 간간이 신자들의 눈을 의식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나도 모르
게 나의 마음속에 그들의 눈이 하나둘씩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은근히 기대하는 것
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이야기 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인정받고 싶다
는 것이다. 무엇인가 본당의 일을 하고 나서 잘했다고, 잘한다고 잘산다고… 사실 그것이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렴풋하게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싶다는 욕망이 나의 맘속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
고 또 하나 인정받으면서 동시에 칭찬받고 싶은욕망도 있는 듯하다.


본당에서 지내다 보면 나름의 한계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다른 누군가
에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떠넘기고 나 자신에게 독백한다. ‘이건 어쩔 수 없어’, ‘나는 할
만큼 했어’,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이만하면 잘 한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포
기를 해버린다. 그리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오늘 예수님은 사십일 동안 단식하시며 마귀의빵에 대한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예수님을
손으로 떠받치며 그들에게 찬미와 찬양을 받을수 있는 유혹을 받으셨다. 그리고 마귀에게 이제
그만 굴복하라는 유혹도 받으셨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셨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 앞에 무
릎 꿇고 두 손을 모으는 이유도 이 때문이겠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향해가는 사순 시기에 접어들었다. 우린 얼마나 많이 배고픔의 인간
적인 갈망에 사로잡혀 사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이 사람들을 의식해 인정받고 칭찬도 받고 싶어
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이 쉽게 굴복하고 포기하고 살아가는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러한 유혹들을 우리 스스로 직면하고 부딪혀야 하는 시간이다. 치열하게 부딪혀 보시길.

 

-서공석신부-

 

오늘은 사순(四旬) 시기의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전 40일 동안을 교회는 사순 시기라 부르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특별히 기억합니다. 사순 시기는 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부터 시작된 관행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태초에 인간이 유혹에 빠졌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고,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창세기와 복음서가 전하는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물론 아니고, 인간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 다채롭게 꾸며진 이야기들입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이 베푸신 인간의 생명이고 또한 세상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불행이 있는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선(善)과 악(惡)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그 사실을 말하기 위해 인간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는 유혹에 빠졌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인간은 그것이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먹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무엇이라도 자기에게 이로울 것 같으면, 해버리는 비극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모든 것을 그에게 허용하셨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자기를 중심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고 창세기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여 행동하면서, 하느님과 동료 인간 앞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유혹하는 자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탐스럽고 자기를 영리하게 해 주는’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를 따르게 하라는 유혹입니다. 먹고 사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그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거절하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지, 먹고 사는 데에 도움이 되자고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두 번째의 유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신앙인들이 쉽게 받는 유혹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소문을 내면, 사람들은 많이 몰려듭니다. 가톨릭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그런 현상들은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기적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기적을 해 보라는 유혹도 거절하십니다.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 6,16)는 구약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거절하십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이 우리의 생활공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 공간이 주는 제약을 넘어서 마음대로 살기 위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초능력을 얻어서 더 뽐내며 살겠다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그들과 더불어 삽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신앙인은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삽니다.

 

오늘 예수님이 받으신 세 번째의 유혹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모든 사람이 누리고 싶은 부귀영화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도 한 마디로 거절하십니다.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이사야서(42,11)의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고, 하느님을 이용하여 초능력을 발휘하며, 하느님을 이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의식주는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약속된 부귀영화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살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생각합니다. 형제자매 앞에서 인간은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그들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형제자매는 우리가 위해주고 도와주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탐스럽고 우리를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형제자매는 우리의 경쟁상대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빠지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겪으셨다는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것들입니다. 재물을 탐하고, 남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초능력을 탐하고, 부귀영화를 꿈꾸는 우리들입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유혹들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고자 하는 사람이 가지는 마음입니다. 빵만 탐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궁리만 하고, 부귀영화만 쫓아가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둔 사람이 찾는 것들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 다음에 즉시 유혹의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인은 재물이나 기적이나 부귀영화에 마음을 빼앗겨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을 얻어내기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환상을 실현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인 형제자매를 섬깁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이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광야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삶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 감수할 수밖에 없는 각종 실패와 병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독 등은 우리가 겪는 광야입니다. 우리가 의지하여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상실(喪失)의 순간들입니다.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하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기진하여 허덕이는 광야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에도 빵과 기적과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고, 하느님을 택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는 그분이 선하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물, 능력, 부귀영화도 언젠가는 결정적으로 버리고 하느님에게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

 

 

 

 

 

 

 

 

 

 

 

 성 바오로 서점 야곱의 우물  오늘의 복음묵상

http://www.pauline.or.kr/jacob01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의 가장 약한 부분을 통해 찾아오는 유혹 앞에서 당신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광야에서의 유혹 이야기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화해’ 이야기다. 순종치 않았던 아담과는 달리 배고픔도, 세속적 욕심도 모두 물리치고 하느님과 온전히 화해하고자 한 예수님의 이야기다.
문제는 화해의 자리가 영 마뜩잖다는 것이다. 광야가 그 자리인 까닭이다. 구약 전통에 광야는 악마의 활동이 왕성한 곳으로 그려진다. “사막의 짐승들이 그곳에 깃들이고 그들의 집들은 부엉이로 우글거리리라. 타조들이 그곳에서 살고 염소 귀신들이 그곳에서 춤추며 놀리라”(이사 13,21). 복음서 또한 악마를 이 광야에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광야는 또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 척박하고 고생스런 광야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너희는 마치 사람이 자기 아들을 단련시키듯,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단련시키신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알아두어야 한다”(신명 8,5).
광야에서의 단련은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그리 확실한 신뢰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모세를 거슬러, 하느님을 거슬러 물이 없다, 먹을 게 없다 하며 자유와 해방의 여정에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던 이스라엘이었다. 채찍을 들어 아비가 아들을 꾸짖듯 하느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은혜로운 길로 자꾸만 이끌고자 했었다. 그것이 광야에서의 사십 년이었다.
예수께서 이러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받으신다는 사실은 지난날 이스라엘이 겪었던 삶의 궤적과 같은 처지에 놓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달랐다. 사랑받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기꺼이 하느님을 증거하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모습을 광야에서 보여주신다.
유혹자가 돌들이 빵이 되게 하라며 시장하신 예수님을 다그칠 때, 예수께서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되뇌신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빵이 필요한데 말씀으로 이끄신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신명기의 정신, 곧 온 존재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그 가르침을 떠올리며(신명 6,4-5), 예수님의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과 신뢰에 감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돌은 돌이어야 한다는 사실, 빵은 빵이고 말씀은 말씀이라는 사실을 곰곰이 곱씹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시장기를 다른 무엇을 희생시켜 채우려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돌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 존재 자체를 건드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나한테 부족한 것을 너에 대한 억압과 착취로 채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빵이 필요한 것은 나의 관점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관점을 훌쩍 뛰어넘으신다. 필요를 뛰어넘어 ‘다른 존재’, 곧 하느님께로 향한다. 말씀을 언급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말씀은 율법이고, 율법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다. 나의 필요를 넘어 너와의 만남을 지향하는 것이 예수께서 유혹자에게 던져놓은 말이 된다.
유혹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예수님더러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그러면 천사들이 예수님을 받쳐주리라고 단정지으며 예수님을 몰아세운다. 천사들이 받쳐줄 것이라는 내용은 시편 91편에 나타나는데, 유혹자는 시편의 앞뒤 맥락은 다 끊어버린 채 ‘천사가 받쳐줄 것이다.’라는 부분만 인용한다. 시편 91편은 하느님과의 신뢰 관계를 주제로 삼고 있다. 전적인 신뢰 안에 머무는 이를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발 하나 다치지 않도록 받쳐주신다는 얘기다. 그런데 유혹자는 이러한 앞뒤 맥락을 무시한다. 오직 ‘내가 누릴 그 무엇’에만 관심이 있다. 예수 홀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유혹자는 요구하고 있다.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다시 한 번 ‘관계’의 문제로 이야기의 흐름을 되돌린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시험하며 불순종의 행태를 여러 차례 드러냈었다. 마싸에서 마실 물을 두고 주님을 시험했던 이스라엘 백성이었다(탈출 17,2; 신명 6,16). 내가 목마르니 너는 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에 대한 ‘시험’이었다. 그저 내가 필요하고 원하니 내놓으라는 것은 ‘강도의 논리’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유혹자는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유혹한다.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이 예수께 돌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유혹자는 자신에게 경배하는 것으로 제안한다. 예수께서는 단호히 거절하신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신명기 6장
13절의 내용이자, 성경 전체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은 힘의 논리를 통해 지배될지 모르나,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보는 경배와 섬김은 하나의 신앙적 숭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경배한다’는 그리스 말 ‘프로스퀴네오’는 어떤 신적인 힘에 오로지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섬긴다’는 ‘라트레우오 ’는 종교적 예식의 행위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그분께만 전적인 신앙을 보여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보면 그 옛날 태곳적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느님 말씀으로 피조물과 조화롭게 살아갔던 인간,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으셨던 그 순간으로의 회복 말이다. 뱀이라는 유혹자가 들어와 그 조화를 깨뜨려 버린 것을 예수께서는 지금 당신 스스로 그 유혹의 시련을 겪으며 다시 회복시켜 놓고 계시는 것이다.

 

묵상(Meditatio)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 주간에 우리는 각자의 삶을 그리고 그 삶의 자리를 챙겨보아야 한다. 행여 내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무는 존재로서 조화를 잃은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옹기장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빚어주신 노고에 응답하는 게 우리 삶의 태도여야 한다. 예수께서 당신 목숨을 내어 바치는 순종을 통해 우리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우리 삶을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늘 유혹받고 단련받는 삶의 자리가 광야이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나만 있는 세상이 아니라, 너도 있고, 우리도 있고, 그래서 세상이 하느님으로 인해 빚어졌음을 깨닫는 데서 가능한 일이다. 너를 생각 않은 채 나만의 생각과 의향을 강조하는 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유혹하는 자의 논리이자 행동일 뿐임을 깨닫는 사순절이길 기도한다.

 

기도(Oratio)
주님, 저 말고도 제 이웃이 있음을, 그 이웃들 중에는 아프고 힘겹고 그래서 울고 있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제 삶이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게 하소서. 아멘.

 

 

 앵무새 신앙

-박용식신부-

 

몸으로 실행하지는 않으면서 입으로만 외치는 사람을 앵무새에 비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고 말씀하심으로써 앵무새처럼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행동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아주 못 생긴 아가씨가 길을 걷고 있는데 한 상점에서 앵무새가 불렀습니다. "이봐, 아가씨! 진짜 못생겼다."

못 생긴 아가씨는 화가 났지만 참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다음날 다시 그 상점을 지나치는데 앵무새가 또 소리쳤습니다? "이봐, 아가씨! 진짜 못 생겼네."

못 생긴 아가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상점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항의했습니다. 상점 주인은 사과를 하며 다시는 그렇지 않도록 조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그 아가씨에게 앵무새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말 안 해도 알지?"

사실 앵무새는 말을 실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말뜻조차 모릅니다. 앵무새처럼 뜻도 모르면서, 또는 뜻은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신자들이 바로 '주님, 주님' 외치면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쌍한 '앵무새 신자'들일 것입니다.

스테파노씨는 성당에서 모범신자로 인정받아 각종 봉사직을 두루 거쳐 지금은 연령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수산나와 자녀들은 오래 전부터 냉담해 성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남편이 성당이나 동네에서는 훌륭한 사람일지 몰라도 가정에서는 낙제 점수, 아니 빵점이라는 겁니다. 아내에게 표독하고, 부모에게 불효하며, 자식들하고도 원수처럼 지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났다"며 신앙을 버린 겁니다. '주님, 주님' 외치기만 했지, 가정에서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잘못된 신앙생활 때문입니다. 스테파노씨야말로 앵무새 신앙인으로서 무늬만 신자일 뿐 진짜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부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나쁜 사람,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는 하지만 남을 해치지는 않는 보통 사람,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 보통 사람을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은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참 신앙인은 못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상의 이런 기준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을 부르면서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단순히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도움으로써 하느님 뜻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법을 잘 지키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기도도 잘 하고, 봉사도 잘 하고, 주일에 성당에 잘 나오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기본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을 돕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몸과 시간, 재물 등 가진 것 모두를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때 비로소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것이겠지요.

비포장 시골길에서 승객을 태우고 가던 버스가 고장이 나서 멈췄는데 아무리 시동을 다시 걸어봐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승객 30여 명이 내려서 버스를 밀어보지만 10명만 힘껏 밀고, 10명은 미는 척 손만 갖다 대고 있고, 나머지 10명은 뒷짐을 지고 서서 '영차, 영차'하고 입으로 소리만 질렀습니다. 버스는 다시 시동이 걸려 운행을 했지만, 버스가 다시 시동 걸려 움직이도록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은 10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20명은 말로만 또는 미는 시늉만 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본당이나 사회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10명에 속합니까? 힘껏 밀어 시동이 걸리게 한 10명에 속합니까? 아니면 뒤에 서서 입으로만 '영차, 영차'하고 외치는 사람에 속합니까? 말로만, 입으로만 '주님, 주님'하는 앵무새 신자가 되지 맙시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

-최인각 신부-

 

하느님 나라 가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단지 입으로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바라시는 당신의 뜻을 실천해야 함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날에 많은 이들이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더라도,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라고 선언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어 세상에 파견하시며 '가서, 만민을 제자로 삼아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아픈 이들을 고쳐주는 기적을 행하라.'라고 하셨는데,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많은 일을 한 이들에게 왜 '불법을 일삼는 자들'이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파견 받은 이들(제자들)이 파견한 이(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파견한 이를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主客顚倒]. 이처럼 본래의 뜻이나 정신을 잊어버리고 주객이 전도되는 일들이 우리의 일상에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특별히 무지와 권력이 야합하여 일이 진행될 때,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불법을 일삼는 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협조자이지, 하느님이 나의 협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나 자신을 그분의 도구로 내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분과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많은 일을 행하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쉬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고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지만, 정작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식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식별력이 부족할 때,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관철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식별을 위한 최고의 방법은 말씀을 읽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어리석은 사람이 행하는 것이 되어 모두 무너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든든한 반석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삶은 아무리 거센 풍랑이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의 슬기로운 자의 집인지, 아니면 완전히 무너질 어리석은 자의 집인지를 잘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 하느님의 뜻이나 모두의 이익보다는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들과 이에 동조하여 작은 이득이라도 얻어 보려고 애쓰는 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중동과 그 이외 지역의 독재자들과 그 집단이 저지르는 부정과 비리와 불의, 비민주적인 장기집권, 부정축재와 이에 대항하는 국민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정말로 '불법을 일삼는 자들의 행동'입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픔과 어둠을 넘어 한 생애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온 인류에 큰 희망과 사랑을 전해주었던 이들이 있어 한편으로 위로가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마더 데레사, 김수환 추기경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는 작은 성인들이 있어 한편으로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분들은 정말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반석 위에 빛나는 집을 지어 바친 위대한 거인들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누군가로부터 흐뭇한 사람, 슬기로운 사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다시금 다짐하며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용기와 희망을 달라고!

 유혹은 집착의 그림자

-권철호신부-

 

무릇 삶이란 살아 있을 향기를 간직하고 삶이 다한 자리에 울림으로 자리할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기운 한가득 아지랑이 피어나는 길가에서 삶의 향기를 간직하기 위해 오늘도 숱한 떨림 속에 자리하는 삶이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떨림만큼 울림을 간직하게 테니 말입니다.

 

언젠가 선배 신부님께서 기도란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대해 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유독 마음속에 닿았던 것은 집착의 드러남이 유혹일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도 않는 것에 유혹당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유혹이란 집착하는 것의 드러남이고 기도는 그래서 나에게 다가올 유혹의 실체를 확인하게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광야를 향해 나아갑니다.

황량한 모래 언덕만이 자리한 그곳은 간혹 보이는 산조차 산이라 말하기 어색한 흙과 돌로 이루어진 언덕 같은 곳이었을 뿐입니다. 우리네 산이 철따라 옷을 갈아입어 사람의 눈길을 끌어당긴다면 이스라엘 광야는 맨몸, 맨살을 속절없이 내보이는 통에 보는 이가 오히려 난처해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자연의 풍요로움에 마음의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입고 있던 옷조차 벗어 덮어주어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광야는 빛의 색감이 어디보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시시각각 태양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음영이 드러나는 것이 마치 하느님

햇살에 의지해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낼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광야를 찾으신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였을 겁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 인간이 자신을 가리고자 입은 온갖 옷들을 벗어 던진 오직 하느님의 손길로만 자신을 치장하고자 하는 열정이 살아 쉬는 곳이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란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이 입고 있는 위선과 거짓, 탐욕의 실체를 유혹의 그림자를 통해 확인해 보는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단한 같지만 끼만 굶어도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약함을 마주해야 하는 , 채워질 없는 탐욕의 창고와 결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욕망의 깊이를 위해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 사순절입니다. 하느님의 따사로운 햇살 조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삶이었는데, 어찌하다 이렇게 덧씌워진 욕망들의 두터운 옷들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는지 되돌이켜 보는 시간이 사순절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순절이 은총의 시간일 있음은 하느님으로만 지탱되어지고자 하는 우리의 간절함이 자리하기 때문이고, 단지 고통과 고난으로 초대된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손수 시중들기 위해 초대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예수님에게 광야가 그러했듯이….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반명순 수녀-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결단으로 나갈 굳센 믿음을 더해 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절제와 희생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수난과 죽음은 고통과 절망을 불러오며, 그것 자체로 어두움이고 메마른 광야와 사막이 되어 우리 내면에 펼쳐집니다. 그러나 광야는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불러옵니다.(묵시 21, 1 참조)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로 광야”
(마태 4,1)에 나가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당신의 신원과 직무에 공적인 확신을 불러왔습니다. 성령은 ‘광야’라는 거칠고 황량하며 고독한 장소로 예수님을 인도하며 ‘하느님 아들’로서 직무를 어떻게 수행해 갈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간의 광야생활에서 유혹을 받았듯이 예수님께서도 “사십 일간 밤낮으로 단식”(2절)을 하신 다음 악마의 유혹을 받습니다. 악마는 하느님 뜻을 거슬러 세상을 따르도록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유혹자”(3ㄱ절)입니다. 유혹자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계시된 말씀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3,17; 4,3.6), 돌들에게 빵이 되게 하라고,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보라고 합니다.
빵은 생명 보존을 위한 생활필수품입니다. 악마는 예수님께 현세의 목적을 위해 메시아의 영적 능력을 이용하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만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끊임없이 받는 유혹입니다. 거룩한 것까지 육신을 위해 쓰도록 충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모든 의로움’
을 이루기 위해(3,15)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것처럼, 현세의 메시아가 되라는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빵이 아닌 하느님의 모든 말씀”(4,4ㄷ)으로 살아가며 그분만을 섬기겠다고 하십니다.(10절)
“몸을 던져보라.”
(6ㄱ절)는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정하고 떠보라는 유혹입니다. 시편 91,1112을 글자 그대로 인용하는 악마한테 예수님은 성경의 근본 의미를 들어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7절) 하고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그분을 시험했지만(1코린 10,9 참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하느님을 시험하기보다 끝까지 신뢰하고 순종하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표명하십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며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4,9) 하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악마의 약속은 이미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이신 메시아한테 하셨던 말씀을 이용한 것입니다. 세상은 악마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테서 예수님께 위임된 것입니다.(시편 2,8; 72,8; 마태 28, 18) 또한 ‘경배하다’라는 동사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완전한 복종을 뜻합니다.(마태 2,2; 2, 11; 8, 2; 9, 18; 창세 37,710 참조)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빠졌던 최초의 유혹(창세 3, 17)으로 제1계명을 거슬러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10ㄴ절) 하시고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10ㄷ절) 하며 물리치는 동시에, 예수님의 승리와 하느님 아들로서 권위를 확고히 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충실한 새 이스라엘이 되십니다. 유혹을 물리칠 때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습니다.”(11절) 이렇듯 유혹을 물리친 광야는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하고 그분을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 사건과 이어진 유혹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시련과 유혹 속에서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야 하며,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유혹에서도 승리할 것을 보여줍니다.

묵상
(Meditatio)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 이 얼마나 크고 위험한 유혹입니까?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서,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하는 나의 관념 앞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못할 것이 무엇이며 왜 당장 행동하지 않으시는가 하며 수없이 되뇌던 저한테 다가온 유혹이기도 합니다. 저의 믿음을 땅에 묶어놓은 채 예수께서 현세적 욕구를 채워주는 메시아로 오시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왕좌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영원한 것을 바라보라 하십니다. 구원은 ‘돌이 빵이 되는 것’에 있지 않으며, 참된 믿음은 몸을 던져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졌을 때 나를 받쳐주는 기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악마한테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더 큰 권력을 얻기도 하지만, 그 대가로 자유와 사랑을 잃게 됩니다.

기도(Oratio)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시편 95, 8)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로마 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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