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6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가 9,22-25)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save it
말씀의 초대
모세는 자신을 통하여 제시된 주님의 길을 장엄하게 전해 준다. 이제 백성은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간다면 살 것이며 번성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는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시는지 실감합니다. 생명과 행복의 길을 걸을 것인지 아니면 죽음과 불행의 길로 갈 것인지의 선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집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 있다는 것을 이 사순 시기에 새롭게 깨닫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고, 그 삶의 의미는 선택의 결과로 결정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이 그 기준이었다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과연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질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언하신 뒤 이러한 요구를 제자들에게 하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십자가의 길은 온전하고 참된 삶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하여 십자가의 길이란 다름 아닌 '사랑의 길'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랑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웃의 짐을 대신 져 주는 길이기도 합니다. 김용택 시인의 '노을'이라는 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러한 사랑에서 우리는 참생명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눈부시게,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지는 해 아래로 걸어가는/ 출렁이는 당신의 어깨에 지워진/ 사랑의 무게가/ 내 어깨에 어둠으로 얹혀 옵니다/ 사랑은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사랑은,/ 사랑은,/ 때로 무거운 바윗덩이를 짊어지는 것이더이다."
< 죽어야 산다 >
-전삼용신부-
용배는 아이들이 ‘바보’라고도 부르고 ‘똥빼’라고도 부르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조금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눈 크고 마음씨 착한 아이입니다.
교실은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로 시끄러웠습니다. 여자 담임선생님은 한쪽 책상에 앉아 무슨 일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가 일손을 잠시 멈추고 아이들을 타이릅니다.
“조금만 조용히 해라. 선생님이 지금 너무 바빠서 그래....”
이 말에 교실 분위기가 잠시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또 속달속달 수선을 피워댔습니다. 순하기만 하던 선생님도 화를 버럭 냈습니다.
“조용히 좀 하라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선생님이 바쁠 때는 조용히 자습할 줄도 알아야지.”
교실 안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선생님은 일 하던 책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아이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기저기서 쿡쿡 웃음이 터졌습니다.
“도대체 누구니?”
선생님은 교실 뒤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선생님은 용배의 등 뒤에 삐뚤빼뚤 커다란 글씨로 써진 “똥빼 바보”라는 종이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어? 누구야?”
개구쟁이 영만이가 슬며시 손을 들었습니다.
“영만이 너는 앞에 나가 손들고 서 있어. 서 있다가 떠드는 아이가 있으면 앞으로 불러내. 그러면 너는 들어가도 돼. 알았지?”
잠시 후, 영만이는 짝궁과 소곤거리는 남자아이를 불러냈습니다. 불려나온 아이는 영만이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일분도 안 돼 떠들지도 않은 용배를 날 선 목소리를 불러냈습니다.
“용배, 너 나와.”
용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교실 앞으로 나갔습니다.
용배는 두 손을 번쩍 들고 교실 앞에 섰습니다. 물렁팥죽 같은 용배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마음 놓고 시시덕거렸습니다. 깨죽깨죽 까불며 자리를 옮겨 다니는 아이도 있었고, 움켜쥔 주먹을 용배에게 들어 보이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용배는 큰 눈을 슴벅이며 떠드는 아이들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배윗덩이처럼 무거워진 두 손을 치켜들고 용배는 끙끙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용배는 팥죽같이 땀을 흘리며 이십 분이 넘도록 서 있었습니다.
“용배, 너 정말 아무도 불러내지 않을 거야?”
선생님은 고통스러워하는 용배가 안쓰러워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용배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선생님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용배의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 용배의 눈물과 함께 교실 바닥으로 방울방울 떨어졌습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릴 때까지 용배는 아무도 불러내지 않았습니다.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용배에게 다가갔습니다.
“용배야, 이제 그만 손 내려도 돼.”
선생님은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용배를 안아 주며 말했습니다.
“용배야, 미안해.... 선생님이 너무 미안해... 이렇게 착한 용배를 친구들은 왜 바보라고 놀리는지 모르겠구나.”
선생님은 용배 눈가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만가만 닦아 주었습니다. 눈물을 닦아주는 선생님의 눈가에도 눈물이 어른거렸습니다. 용배를 괴롭히던 아이들도 모두 다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창문 밖 은행잎이 팔랑팔랑 춤을 추며 땅 위로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연탄길 3, 내 짝궁 용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주 당연한 듯이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용배 반 안에서 선생님을 포함해 모든 아이들은 살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조용해 주기를 원했고,아이들은 떠들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는 이 두 세력 사이에 끼어서 살지 못하고 희생당한 한 아이가 바로 용배입니다. 용배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희생하여 죽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나 아이들은 이 용배의 죽음으로 스스로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용배는 죽었지만 반에서 가장 인정받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빛이 되었습니다. 용배 덕으로 그 반은 서로를 배려해주는 사랑이 넘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 위에 내려옵니다. 성령은 우리의 제물이 바쳐지는 제대 위에만 내려오십니다. 성모님의 자기를 봉헌하는 ‘아멘!’이란 희생 위에 성령의 은총이 내렸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아멘’ 위로 아버지로부터 부활의 성령을 받으신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이 세상에도 그 은총을 충만히 뿌려 주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내려오실 수 있는 유일한 제대였고,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을 희생함으로써 그 위해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밀알이 빻아져 빵이 되어 봉헌되지 않으면 그것이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희생되고 봉헌될 때야만 나도 살고 세상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어야만 살 수 있다는 진리는 우리가 사순절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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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도 자고, 또한 읽고 싶었던 책도 읽으면서 방 안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 방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텔레비전이 보였고, ‘무엇을 하지?’ 하고 전원을 켰습니다. 그리고 채널을 돌리는데, 너무나도 많은 채널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채널이 있지만 마땅히 고정해놓고 볼 프로그램은 없다는 것이지요. 조금 흥미 있는 것 같았지만, 다른 채널에도 재미있는 것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얼른 채널을 변경하게 되더군요.
선택의 폭은 넓지만, 특별히 선택할 것이 없다는 것. 어쩌면 세상 안에서 이러한 갈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선택의 폭이 얼마나 많은 세상입니까?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고……. 그러나 문제는 정작 아무것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선택의 갈등 때문에 아예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선택하자니 다른 것을 못하게 될 것 같고, 그래서 다른 것을 선택하면 왠지 손해를 보는 느낌입니다. 특히 많은 물질적인 것들과 세속적인 것들의 홍수 속에서 더욱 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지를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과연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선택의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은 곧 세상의 것보다는 주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것을 선택하지만,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주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요즘의 사람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으로 참 많은 것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진, 인터넷, 게임, 음악 등등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더군요. 교구청의 어떤 신부님도 이 스마트폰으로 참 많은 것을 하시면서 잘 활용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화를 할 때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은 스마트폰. 그러나 전화통화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전화기가 아니라고 할 수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도 참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선택하고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정말로 중요한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반성하는 이 사순시기가 되길 바랍니다.
내 십자가 구별법
-임의준 신부-
젊은 수사님이 스승님께 물어봅니다.
“스승님, 하루 종일 기도하고 찾아보려고 해도 저의 십자가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서 그것을 찾아서 진정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을 걷고
싶습니다. 의미 없는 일들의 연속인 이런 날들이 예수님께 죄송합니다.”
흰 수염을 기르신 스승님께서 젊은 수사님에게 대답하십니다.
“사랑하는 수사님, 제가 보기에는 당신의 등 뒤에 이미 십자가가 있습니다.
등에 지고 십자가를 찾으시면 찾으실 수 없죠.”
“등 뒤에 있다니요?”
“예, 바로 당신이 지금 자신의 특별한 십자가를 찾고자 하면서도
천하고 귀찮게 생각하며 피하고자 하는 일상의 일들, 맡은 일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십자가입니다.”
자신이 피해가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 매 순간 다가오는 삶의 한 조각
조각들. 그것들에 충실하지 못하면 아무리 거창한 십자가라 할지라도
그저 지고 갈 수 없는 허상의 십자가일 뿐입니다. 매일의 기도, 매일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나만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되지 않을까요?
부활의 기회
-현대일 신부-
늙어서 죽거나 병들어 시름거리다 죽었을 경우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곳 파푸아뉴기니에선 갑자기 죽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낮에만 해도 친구들과 뛰놀던 애가 자던 중에 갑자기 숨지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는 코코넛을 먹고 복통을 호소해 병원으로 가던 중 죽었습니다. 동네에 콜레라가 돌자 일가족이 갑자기 숨지고 그 옆집 가족도 차례로 죽어 나갑니다. 이런 갑작스런 죽음을 접할 때 이곳 사람들은 ‘누가 죽였는가 ?’ 를 물으며 서로를 의심하고, 악령적인 주술사를 동원하여 죽음의 이유를 묻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그저 미개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한편 열심히 미사에 나오는 아이의 부모,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그 마을 신자를 보면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구나. 이 힘이 이들을 죽음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려움을 겪어야 할 뿐 아니라 사회 지배계층으로부터 배반당하고 게다가 죽기까지 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죽음의 경험, 곧 수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모든 사람한테 내동댕이쳐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쉽게 하느님을 원망하고, 이웃을 원수로 여겨 등을 돌릴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원수가 꾸민 독살, 또는 사악한 주술사를 떠올리는 원주민처럼 이는 인간의 기본적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자세는 한 발짝 더 나가야 합니다. 이 어려움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부활의 기회라고. 그리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들숨, 날숨, 우리 목숨
-김찬선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 말씀을 눈여겨보면 <자기 목숨>과 <목숨>이 나옵니다.
<자기 목숨>과 그냥 <목숨>은 다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하느님이시지요.
그러나 나의 하느님은 인격적이고 주관적인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나의 소유가 될 수 없고, 내 안에 갇힐 수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오시어 개인적으로 체험되어지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이때 하느님은 나와 상관없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
내 삶 안에 들어오신 내 사랑의 하느님, 나의 주 하느님이 되십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체험하고 이해한 나의 하느님을
하느님의 전부인양 주장하고,
선민사상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느님을 나 혼자 독점적으로 소유하려고 한다면
나의 하느님은 내 안에서 살아계실지 모르지만
참 하느님은 내 안에서 돌아가시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내재적인 분이시고,
그러므로 초월적인 하느님과 내재적인 하느님을 동시로 체험할 때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함으로써
하느님은 참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내 사랑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우리의 목숨, 곧 나의 목숨은 내 안에 들어와 계신 하느님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목숨은 하느님의 숨이 우리 목 안으로 들어온 것이고,
다시 그 숨을 들이킬 때 나는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숨이란 내 쉴 때 들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목숨이란 숨을 들이키기만 해서는 끊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란 숨을 들이키지 않아 목숨이 끊어진 것이지만
들이킨 숨을 내 쉬지 않아 목숨이 끊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목숨이란 들숨과 날숨을 합친 것입니다.
하느님도 그렇고,
생명이신 하느님도 그렇고,
하느님께서 주신 목숨도 그렇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선들도 그렇고,
<주거니 받거니>, <give take="Take" and="and"></give>를 잘 해야 합니다.
움켜쥐고 돌려드리지 않으면 죽거나 악이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모든 것을 늘 돌려드리라(reddere)고 합니다.
그리고 “Deus meus, Omnia”
곧, “나의 하느님, 모든 것이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것, 나의 생명과 나의 하느님까지, 하느님께 돌려드릴 때
모든 것, 생명과 하느님까지, 나의 것이 될 수 있고,
그래서 나의 하느님이 나의 모든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시며, <모든 것이신 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뜻을 새기며 성가 210번을 새롭게 불러봅시다.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나의 음성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나의 재능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그리고 다른 것도 집어넣어 노래를 이어갑시다.
“나의 ---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나의 ---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십자가의 신비
- 김미자 수녀-
고통?·?배척?·?죽음은 우리가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난?·?배척?·?죽음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고 예고하셨습니다. 신앙인인 우리도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고통을 피하고 안전하게 살려고 신앙생활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같지 않다(이사55,?8???9)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고통을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주십니다. 죽음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의 순간이 왔을 때,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갈 때 부활의 은총은 동녘 하늘에 아침 해가 떠오르듯 그렇게 밝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성녀 소화 데레사는“고통은 은총의 전주곡이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신앙 안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모순되는 것 같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더 높은 곳에 살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저희 수도회 설립자 무아 방유룡 신부님은 ‘십자가가 귀찮다고 내던지면 더 큰 십자가가 오고, 희생정신으로 참아 받으면 고객의 길동무가 되네.’?라고 영가에서 말씀했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도 하느님이 주신 십자가를 잘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합시다.
자살을 위해 인적이 없는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칼로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바로 앞에 자신보다도 큰 먹이를 물고 가는 개미 한 마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고 가다가 먹이를 놓치고 또다시 먹이를 물고 가다가 또 놓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를 느낀 장군은 자살할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개미를 계속해서 따라갔습니다. 개미는 먹이를 자그마치 79번이나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80번째에 개미굴로 먹이를 들고 들어가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장군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겨우 한 번 밖에 실패하지 않았는가? 저 하찮은 미물인 개미도 79번이나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국 성공했는데, 단 한 번 실패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개미를 통해 용기를 얻은 그는 다시 돌아갔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고통과 시련으로 큰 좌절감에 빠지신 분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좌절감에 빠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피조물과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귀한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귀한 존재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에 걸맞게 살아가는 방법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닮은 삶,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에게 고통과 시련이라는 십자가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몇 차례의 실패를 경험한다 할지라도 이 십자가를 팽개쳐서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 십자가 건너편에 구원의 길이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잘 짊어질 수 있도럭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하시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을 깨닫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되셨으면 합니다.

참 생명
-김성웅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가져오는 세상의 세력들을
멀리하고 생명의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작년
이맘때에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화 <워낭 소리>의 몇 장면들이 스쳐갑니다.
불구가 된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늙은 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가는
주인공 할아버지의 모습, 옆 논에서 탈곡기로 추수를 하고 농약을 뿌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낫으로 추수를 하고, 소에게 먹일 풀이 오염될까봐
농약을 쓰지 않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다리를 절며 김을 매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새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언뜻 보기에 할아버지와 늙은 소는 변화되는 세상의 흐름을 외면한 채
애써 쇠락한 몸으로 삶의 십자가를 청승맞게 지고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장면들을 곰곰이 묵상하다 보면, 할아버지와 소는
그러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삶의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을 나누어주는 동반의 여정을 걷는 것이 보입니다.
특별히 사순 시기를 맞이하면서 지난 시간과 현재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가 애써 얻고자 하는 세상의 세력은 무엇이며 나 자신과
형제들의 참 생명은 제대로 배려되고 있는지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관상, 그것은 외면에서 직면으로
-김찬선신부-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설마 주님께서 생명 아닌 죽음을 내놓으시고
더 더욱이 축복 아닌 저주를 우리 앞에 내놓으실까?
사실 하느님께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저주라는 것도 없으십니다.
빛이신 하느님께 어둠이 없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어둠이 나오지 않는데
우리에게 어둠이 있음은 우리에게 빛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빛이 없음은 하느님께서 빛을 거두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로 돌아설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설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생명과 축복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에게서 죽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죽음이 있음은
우리 존재가 생명에 잇닿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생명의 길을 알려주시고
그렇게만 하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시는 대로 하면
축복을 받아 살게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이 바로 저주가 되어 죽게 됩니다.
우리의 저주는 축복을 거부해 받지 못함이 저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는
오늘 우리가 들은 신명기에 아주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주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걸을”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인가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6번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양들은 고난과 박해, 수치와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등 모든 점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고 말합니다.
착한 목자를 바라보라고 할 때의 “바라봄”은
라틴말로 “attendo”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저 단순한 봄이 아니라
‘향하여 봄’,
‘직면하여 봄’,
‘집중하고 정신 차려 봄’입니다.
다른 것에 기웃거리면서 흘깃 보는 것이 아님은 물론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그리고 직면하고 정면해서 보는 것입니다.
어떤 주님을 그렇게 보라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주님을 그렇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이 너무도 끔직하여 그 수난이 보기 싫고
그리고 보고서는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아예 안 보거나 마지못해 보는데,
그래서는 안 되고 정면으로 바라보고
더 나아가서 주님의 양들처럼 이 주님을 따라야 함을 얘기합니다.
주님처럼 죽음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생명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갈 때
그들의 수없는 불순명 만큼 도처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불순명의 징벌인 죽음의 불 뱀을 매달아달고
살려면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올려다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외면한 대가로 죽게 되었음을 깨달아 알았다면
늘 죽음을 직면함으로서 주님을 대면하라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십자가를 관상함도 이런 것이겠지요.
십자가를 더 자주 관상하는 사순시기여!
“제 십자가를 지고”
-전삼용신부-
한번은 설교를 아주 잘 한다는 개신교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들어보았습니다. 무언가 배울 것이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했던 이야기 또 하는 것을 느낄 만큼 거의 다 들어보았는데 결국 괜히 시간낭비 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유명하신 분들도 다 “주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지만, 믿지 않으면 힘든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십일조에 대해서는 더욱 그래서 그것을 안 내면 집에 당장 우환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결국 믿고 십일조를 내면 당장 부자가 될 것처럼 믿게 만듭니다. 물론 저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더 많은 것으로 다시 되돌려 받기 위해서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받은 것에 대한 ‘감사’로 바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이 있다면 십일조를 바쳐도 더 힘들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보며, 심하게 말하면,사기 쳐서 사람들을 모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요즘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약을 보며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정말 자랑스럽고 ‘고생들 많이 했겠다.’ 싶습니다. 단 몇 초를 달리기 위해서 했을 피나는 노력 때문에 더욱 감동스럽습니다. 그들의 고생은 기쁨의 눈물로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금메달의 영광만 강조하고 그 오랜 숨은 고생은 간과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가르침이겠습니까? 만약 그 힘든 훈련의 과정을 생략하고 그 운동만 한다면 금메달을 딴다고 사람들을 꾄다면 그것은 일종의 사기 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절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모으지 않습니다. 먼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를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스승의 미래가 이렇다면 그 제자들의 미래는 어떻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제들이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가시밭길이 뻔히 보이는 삶인데 어떻게 가족을 만들어 함께 고통을 당하게 하겠습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서의 영화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당신도 가난하셨고 부자가 당신 나라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임도 일러주시기는 하지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길은 꽃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임을 미리 일러주셨습니다.
한 번은 박지성 선수가 챔피언스리그 준결승까지는 역할을 잘 했다가 감독이 결승에서 이름을 빼는 바람에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메달은 결승에 뛴 선수들만 받기 때문입니다. 모든 과정을 다 뛰었어도 결승에서 제외되었기에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잘 져서 스스로를 구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 분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하나의 영광을 향한 노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 받지 않으셨다면 그 영광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구원의 영광은 그 십자가 희생에 동참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영광을 아무에게나 나누어주시지 않고 그 고통의 자리에 우리가 참여할 몫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 1,24)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덕으로 우리가 그 영광에 참여합니다. 마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들어주어서 그 희생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듯이 우리도 그분의 희생에 참여함으로써 그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헬레나 성녀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아와 조각조각 나누어 귀중한 곳에 보관하도록 여러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 조각들이 합쳐지면 하나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저보고 ‘당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제가 진 십자가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온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십자가를 결합하여 예수님 십자가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면 돈도 잃을 수 있고 가족도 잃을 수 있고 직장, 명예, 혹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일부분이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 목숨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리스도를 따르시겠습니까? 그럼 오십시오.
<오징어 덮밥 3인분>
양승국신부-
오늘 재의 수요일 점심때까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단단히 각오를 했기에 점심때까지는 아예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었지요.
점심식사도 최소한 간단히 요기만 했습니다. 계속 식탁에 앉아있으면 유혹이 생길 것 같아 빨리 일어섰지요. 그런데 문제는 저녁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별로 식욕이 없었는데, 하필 오늘따라 왜 그리도 입맛이 당기던지 신기했습니다.
그래도 꾹 참아야했지요. 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먹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사탄의 소행인지 갑자기 고봉으로 가득 담긴 밥 한 양푼이 제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오늘 따라 국물이 걸죽한 오징어 볶음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손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3인분은 족히 될 밥에 국물이 "왔다!"인 오징어 볶음을 넣어 열심히 오징어 덮밥을 만들었지요.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리는 순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오징어 덮밥 3인분은 이미 하나도 남지 않았고, 아침의 굳은 결심은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징어 덮밥이란 유혹 앞에 완전히 제 정신을 잃은 제 모습이 한심한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제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자기를 버리기
2. 매일 제 십자가를 지기
3. 예수님 뒤를 따르기
자기를 버린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이 사순기간 우리가 가장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 안에 형성시키기 위해 어제의 낡고 닳아버린 우리 자신과 결별한다는 것입니다.
그릇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그릇의 가치는 천차만별입니다.
고급 향유가 가득 담긴 그릇은 향유 못지않게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깁니다. 그러나 개밥을 담는 그릇은 사람들의 발길에 자주 차이면서 홀대받는 개밥그릇일 뿐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 하실 때 우리 역시 덩달아 가치 있는 사람, 존엄성 있는 인간, 아름다운 그릇으로 평가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는 각별한 새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기 위해 낡고 퇴색되어 초라해진 우리 자신을 비우는 일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어제의 나와 작별하고 다시 한번 일어서는 일입니다.
목숨이 붙어있음을 하느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는 표시로 여기는 일, 다시금 우리의 몫을 살아내는 일, "내 몫이려니"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이야말로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