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2014. 2. 23. 오후 4:55:35

글자

2014 2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먼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는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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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마태16,13-19) 


He said to them,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Simon Peter said in reply,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Jesus said to him in reply, “Blessed are you, Simon son of Jonah.
For flesh and blood has not revealed this to you,

but my heavenly Father.


말씀의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맡겨진 양 떼를 사심 없이 돌보아야 한다. 부정한 이익을 구하지도 말 것이며, 양 떼를 지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열성을 다함으로써 양 떼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당신이 누구라고 하는지 사람들에게 물으신 뒤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베드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그를 반석으로 삼아 당신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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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최근 몇 달 간 미사 드릴 때마다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 있습니다. 성찬 전례 때 감사 기도의 전구 기도문을 읽다가 ‘교황 프란치스코’ 하는 부분이 나오면 마음이 환해지기도 하고 뭉클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교황님을 선물하신 것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함을 우리 모두는 깊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사로잡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인격의 매력에 대하여 언론에서는 ‘파격적’이라는 표현과 함께 ‘소탈함과 겸손함’이라고도 합니다. 때로는 ‘예언자적이고 개혁적인 모습’이라거나 ‘복음적인 삶’이라고도 합니다. 다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황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 있고 생생한 신앙을 증언하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신앙이 그분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하신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한 이에 대한 깊은 애정뿐 아니라 격식에 매이지 않는, 가슴속에서 샘솟는 신앙의 기쁨 역시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외신을 통하여 소개되어 많은 사람을 미소 짓게 하였던, 교황님이 집전하시는 미사 중에 마음껏 뛰놀다가 교황님의 의자에 앉은 어린아이의 모습은 그분의 삶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기쁨과 참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신앙이 짜인 틀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증언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교황님에게서 보며,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의 고백을 생각해 봅니다. 바로 자신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신앙의 기쁨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면, 복음적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자신만을 돌보는 마음에서 벗어나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이상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미소 짓게 하시는 교황님에게서 무엇보다도 경직된 삶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신앙의 기쁨을 배우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느 날, 여행을 위해 세면도구를 챙기는데 늘 가지고 다니던 샴푸를 넣는 통이 없어진 것입니다. 떠날 시간은 가까워지고 통이 없어서 샴푸를 가져갈 수 없어서 그냥 떠나려고 했지요. 바로 그 순간 주방 싱크대 쪽에 조그마한 통이 하나 보였습니다. 여행용 조미료 통으로 이 안에는 간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얼른 간장을 비우고 이 통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간장 냄새가 사라지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떠날 시간이 다가와서 어쩔 수없이 그냥 통에 샴푸를 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행 가서 도저히 이 샴푸를 가지고 머리를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샴푸의 냄새와 간장 냄새가 섞여서 아주 이상한 냄새가 제 코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이를 이용해서 머리를 감으면 머리에서 분명히 간장 냄새가 날 수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샴푸를 담기 위해서는 간장을 버리고 우선 빈 통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빈 통을 아주 깨끗하게, 즉 냄새가 전혀 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닦아야 했지요.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 아주 간단한 원리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마음을 내 마음 안에 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야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하다면 과연 주님의 마음을 내 안에 채울 수 있을까요? 또한 이 정도는 괜찮다면서 약간만 비운 뒤에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할까요? 도저히 가능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안에 모든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만 주님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완전히 비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면서 우리들의 마음이 깨끗해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매일의 성찰, 미사, 고해성사, 그리고 각종 피정과 강의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정화시켜주십니다. 그런데 혹시 그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우리들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그런데 이 사도좌를 운으로 그냥 얻은 것일까요? 예수님께 특별히 잘 보여서 얻은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대신 주님의 마음으로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 복음에 나와 있듯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제대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고, 순교까지 하시게 됩니다. 

우리 역시 끊임없이 나의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닦고 닦아서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한 이상한 냄새를 없애고, 대신 주님의 마음을 채워 그리스도의 향기가 끊임없이 풍기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은 지름길을 원한다. 나는 최고의 지름길은 돌아가는 길이라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묵묵히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랜디 포시).



실패와 성공

 


교육 심리학자로 유명한 미국의 훼스팅거(L.Festiner) 교수는 “시험 잘 봤느냐?”라는 질문 하나라도 어떤 고등학생이 대학입시에 합격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망했습니다. 못 봤습니다. 기대하지 않아요. 그런대로 봤습니다.”라는 대답을 했다면 불합격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자신의 실패 요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문제가 어려웠는데 1번 문제부터 틀린 것 같아요. 듣기 평가에서 거의 들리지 않았어요.” 이런 식의 대답이라면 합격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실패 요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실패 요인을 잘 아는 학생의 합격률이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을 모두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실패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이지요. 문제는 그 실패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이는 그냥 실패 안에서 불평불만만을 간직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왜 실패를 주셨냐면서 불평불만을 던져서는 안 됩니다. 이 실패를 주셨다는 것은 어쩌면 성공을 얻기 위한 준비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실패의 요인을 정확하게 찾으십시오. 그래야 실패를 통해서 성공이라는 선물을 주님께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라는 실타래

-김경진 신부-


우리는 살면서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관계가 틀어지고, 서로 등지고 으르렁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또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미워하는 감정을 마음속에 품고 겉으로는 친한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여러 사람과 틀어진 채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결국 땅에서 매여 있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럼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하늘에서도 매여 있게 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참 기쁨과 행복을 간직한 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인간관계라고 하는 실타래를 잘 풀어야 할 것입니다. 엉킨 실타래를 잘 풀려면 서두르지 말고 처음과 끝이 어디인지 잘 살펴서 차근차근 풀어가는 게 상책입니다. 이것이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위한 기술입니다. 실타래를 풀기 위한 캠페인으로 이렇게 제시하고 싶습니다. “서로를 알아줍시다.”

서로를 알아준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드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알아주셔서 하늘나라 열쇠까지 맡겨주시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때문에 살맛 나고 베드로는 예수님 때문에 살맛이 났을 것입니다.

문득 이런 문구가 생각나네요. “서로를 몰라줄 땐 서운함 가득, 서로를 알아줄 땐 기쁨이 가득!” 서운함은 자칫 미움을 낳고, 미움은 증오를 낳고, 영적 살인인 무관심을 낳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상대방이 “제 맘 알지요?”라고 묻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줍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럼 얽혀있는 실타래가 술술 풀리고 오늘 하루가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조명연신부-


지 금 저는 본당신부의 삶이 아닌, 교구에서 성소자 육성을 담당하는 성소국장 신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 역시 본당신부를 해보기는 했지만, 본당이 참 재미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많은 교우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사목을 하다보면, 많은 보람과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교구에 있다 보니 그러한 재미를 얻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본당 신자보다는 신학생, 예비신학생들을 만나야 하고, 오로지 신자는 한 달에 한 번 이루어지는 성소후원회 미사를 통해서만 만날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신부님도 본당신부 하고 싶죠?”

본당신부를 하기 싫다면 거짓이겠지요. 또 본당신부로 살고 있는 신부들이 무척 부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운영하는 카페(http://www.bbadaking.com)를 통해 더 큰 보람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 실 본당신부가 미사 때 강론하면 몇 명이나 듣습니까? 아무리 큰 본당이라 해도 평일에 기껏해야 2~300명 듣겠지요. 그리고 미사가 끝나면 그 강론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합니까? 아니지요. 그냥 미사가 끝나면 어떤 강론을 했는지도 기억 못하는 신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제 카페에서 보통 800~1,000명 정도가 제 강론을 읽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제 강론을 읽고서 다른 사이트로 옮겨주십니다. 이런 식으로 제 강론을 읽는 분이 하루 몇 천에서 몇 만 명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말 도 많고 탈도 많다는 인터넷이라는 공간. 그러나 이 공간 안에 저는 어마어마하게 큰 본당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 모두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이곳저곳으로 전파하고 있었습니다(다른 사이트로 제 글을 옮겨주시고, 열심히 댓글을 다시면서 강론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시는 것 등등). 얼마나 보람 있고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도 ‘본당신부’만을 꿈꾸고 있었던 한심한 제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중 요한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어떠한 상황에 상관없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고백 없이 그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때로는 부정적인 행동과 말을 통해 남을 딛고 일어서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온 소중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가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아닌 주님이 첫째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베드로의 고백인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을 내 자신이 하고 있었는지를 묵상해보셨으면 합니다. 이러한 고백 없이 내 자신을 낮출 수가 없으며, 지금의 내 자리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을 때의 당신이 당신의 참다운 모습입니다.(앤 랜더스)

 

 

확장되는 사랑의 개념

 

-양승국신부-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참으로 감격스럽고,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의 성찬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는 감격을 맛볼 수 있습니다. 매일 우리에게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순간순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다양한 선물과 은총은 또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요. 늘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지낼 일입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습니다. 동전의 앞면이 있으면 반드시 뒷면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 삶에 부과되는 여러 가지 의무들이 참 많습니다.

 

주일미사 의무라는데 왜 그렇게 빨리 빨리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주일만 되면 왜 그렇게 눈도장 찍어야 될 곳이 많은지요? 주일미사 빼먹고 나면 성사를 봐야 되는데,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성사보기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뿐인가요? 꼬박꼬박 교무금 내야지요. 잘 못 걸리면 건축헌금으로 목돈도 내야지요. 뿐만 아닙니다. 조금만 처신 잘못하면 천주교 신자가 저런다고 손가락질 받기 십상입니다.

 

거기다 우리 삶의 지침이자 길잡이이신 예수님께서는 요구도 참 많으십니다.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유다인들의 생활 준거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저 법대로입니다. 특히 동태복수법이 강조됩니다. 누군가가 내게 잘못해서 내게 피해를 끼쳤다면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고 꼭 그만큼 을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혈육들, 가족, 친척, 친구들, 다시 말해서 이웃들은 당연히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 이방인들, 큰 피해와 상처를 준 사람들, 우호적이지 않은 다른 민족들은 늘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안 그래도 노는 물이 다른 종족, 더럽혀진 사람들로 여겼는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자 제자들도 즉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스승님 저들을 그냥 둬서 되겠습니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버릴까요?

 

제자들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구약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족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만 나를 냉대하고 피가 다른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그저 그들은 물리치고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사랑의 개념을 더 크게 확장시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만 한정시켰던 사랑의 실천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넘어 나를 박해하고 나를 위협하는 원수들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내 사랑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큰 사랑, 보다 이타적인 사랑, 보다 신적인 사랑으로 넓혀나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살아 계신 하느님

-정순용-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주저함 없이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고백은 현대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나, 유다인들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번역에서는 스승님이란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단순하게 2인칭, ‘당신이란 표현으로 나옵니다. 이 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살아 계신 하느님이란 표현과, 둘째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표현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이란 고백은 멀리 생각과 상상으로만 만나는 하느님
, 철학적 하느님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 안에서 함께 희로애락을 겪는, 우리와 관계성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더불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는, 아드님인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인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고백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체험이 발생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느끼는 체험, 아빠라 부르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하느님 자녀 체험,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죄와 
유혹으로부터 구원받았음을 느끼는 해방 체험, 이런 체험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 김인순 수녀-

누군가는 세상의 불의에 맞서는 정의 자체이신 분으로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은 어느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엄한 분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는 분, 늘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정의는 몇천, 몇만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모두 각자의 처지와 경험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모든 표현이 일부분을 설명하는 것일 뿐 전체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알려주기엔 너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각자가 지닌 인간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으로 머물고 말 것입니다.
저 또한 상황과 분위기, 그리고 마음의 경향에 따라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규정지은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저의 인간적인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분이시라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아 나가고 있습니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도
.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 하느님의 지혜이시며 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지식의 틀을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아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짧고 빈약한 저의 인간적인 깨달음에도 실망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올바른 모습을 알려주시려고 끊임없는 인내와 격려로 한 걸음씩 이끌어 주십니다.

 

 

 

 

이해의 영어 단어는 ‘Understand’ 입니다. 그런데 이 영어 단어를 잘 살펴보면 Under + Stand의 결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 있어 보는 것이 ‘이해’라는 단어라는 것이지요. 이 단어의 구조를 보면서 이해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이 단어의 구조대로 생각한다면 상대방 내면 깊숙이 들어가 봐야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말로는 이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해가 아닌 ‘오해’를 할 때가 더 많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이해란 나의 입장을 포기하고 너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인데, 우리들은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이해가 아닌 오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해한다는 것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장애인 소식지에서 본 글입니다. 

캠핑을 떠난 일가족이 반대편에서 과속으로 달려오던 대형버스와 정면충돌 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사고로 그 가정은 두 딸을 잃었고 아내도 전신 마비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2년 3개월 간 치료를 받고 퇴원한 후에도 남편은 하루하루 아내를 위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를 파괴된 가정이요, 가장 불쌍한 부부라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행복합니다.”

남편은 새벽 3~4시면 일어나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아내의 누운 자리를 바꿔 주는 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밖에도 그가 아내를 위해 하는 일은 너무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없었다면 지쳐 버렸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3년 6개월 동안 기저귀를 갈아주는 엄마와 같은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아내를 이해할 수가 있고,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는 주님에게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죄 많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신 분, 그렇게 당신의 뜻과 반대로 나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는 분. 이렇게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 인간들을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보내고 있지만, 베드로를 당신의 넓은 사랑으로 이해해주시고 받아주시지 않았다면 과연 교회의 반석이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교회의 반석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베드로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해하는 사랑이 있었기에 베드로는 변화될 수 있고, 실제로 교회의 큰 기둥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해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그 사랑을 본받아 나의 이웃에게 오해가 아닌 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기대하면 어떤 것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면 사소한 것도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사뮤엘 하조).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행복

-고계영신부-

당시 많은 유다인들은 똑똑함에도 불구하고 눈이 가려져 역사의 예수 안에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 
하지만 반면에 어부였던 베드로는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고 있던
 
행복한 사나이 베드로
!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샤워실에 들어갔습니다. 늘 사용하던 샤워실이었는데
, 
그날은 타일들 틈에 끼어 있는 때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 
공동체의 욕실 청소 담당자가 바빴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수세미를 들고
 
닦을 수 있는 만큼 닦아냈습니다. 닦아내는 동안 평화와 기쁨이 느껴졌습니다
. 
예전에는 지저분한 샤워실을 보면, 마음부터 언짢았는데 이것이 성령의
 
열매구나 생각했습니다
. 
샤워실 청소는 일상의 작은 한 조각으로 누군가 해야만 하는, 희생이 따르는
 
귀찮은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귀찮은 일 그 너머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숨어 있습니다. 화장실 타일을 닦으면서 그 순간 일상에 숨어 계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닦고 있는 것 같았고, 그렇게 그 순간 천상으로 날아드는 것 같았습니다
. 
타일 안에 숨어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바라본 나는 행복했습니다.

 


 

 

 

 

신통(神通)한 베드로

-김찬선신부-

시몬은 베드로의 지상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의 천상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 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질 것이랍니다.
게다가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겠답니다.

그의 무엇이 그럴 만한 것이었나요?
그의 지식,
그의 능력,
그의 가문,
그의 업적,
그의 이력,
그의 그 어느 것도 교회의 반석이 되고 
천국의 열쇠지기가 될 만한 것 못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저의 외할머니는 말하자면 신이 내린 무당이셨습니다.
그러나 굿이나 푸닥거리를 하지는 않으셨고 
단골이 중요한 때 찾아 와 뭘 물으면 꿈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神通하게 잘 맞았나봅니다.
꿈속에서 관운장 신이 알려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神이 내리고 神이 알려주면 神通하니 잘 맞출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살과 피의 시몬 바르요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려주시는 베드로가 
하느님 덕분에 교회의 반석과 천국의 열쇠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살과 피로 무엇을 보고 판단하고 실행한다면
그의 교회는 무너지고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부산의 본당에 있을 때 주역으로 점을 쳐주는 분이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와 교리를 배우셨습니다.
그분은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다가 주역을 배우게 되었고
고시에 실패하자 배운 주역을 가지고 점쳐주며 먹고 살았는데,
이 분 말씀이 정신수양을 하지 않고 그래서 욕심이 끼면
점을 잘 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역을 아무리 잘 알아도 살과 피가 작용을 하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로 말하자면 
기도에 해당되는 정신수련을 철저히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어떤 결정을 내리고 무엇을 할 때
종종 인간의 머리로 판단하고 인간적인 능력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랬을 경우 그것은 아무리 교회의 일이어도 인간의 일일 뿐입니다.
교회의 일이 다 하느님의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저와 같이 일을 많이 벌이는 사람은 너무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하려는 것이 하느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 잘 식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를 잘 해야 합니다.
청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神通하기 위해서입니다.

See-Judge-act/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요즘 무슨 일을 기획하고 실행할 때의 방법론인데
우리의 경우는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하느님의 정신으로 판단하고
하느님의 열정으로 행동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그리스도적 권위

-전삼용신부-

처음 베네딕도 16세가 교황님으로 선출 되고 많이 들었던 말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온화하고 잘 생기셨는데 베네딕도 교황님은 얼굴이 무섭게 생기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신부님이 현 교황님의 얼굴이 나온 강복장을 부모님께 선물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강복장을 액자에 넣어 안방에 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잠에서 깨어 처음으로 바라보는 교황님 얼굴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서 다시 떼어 거실에 걸었다고 합니다.

정말 겉만 보아서는 그 분이 정말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교회사에 보면 인간적으로도 잘못을 많이 저지른 교황님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런 교황님이 무류권을 발동하여 선포하는 것은 오류가 없다고 합니다. 사람이 오류가 없다고 하니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에 대한 권위가 믿기 어려운 것은 단지 교황님만이 아니라 모든 주교, 사제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인간적으로도 잘못을 많이 하는 신부님의 비이성적인 지시에 무조건 순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어보입니다.

전에 광주교구 최창무 대주교님께서 나주 성모 발현에 관련하여 엄한 교서를 발표하셨습니다. 그 곳에 가는 누구나,성직자 수도자를 막론하고 파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한 성직자를 파문하셨습니다.

나주 율리아 측에서는 교회가 성모님을 박해한다고 더 크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지금도 신자들이나 수도원, 사제들을 막론하고 어리석어보이는 교회 지도자의 결정에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정말 실수하지 않을까요? 혹시 교회가 정말 성모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인 것 같으냐고 물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을 말하지만 올바른 대답을 듣지는 못합니다.

오직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제대로 보게 해 주신 분이 아버지시기 때문이지 베드로가 믿음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모든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고 또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완전하여 그를 교회의 첫 번째 수장으로 세운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불완전했지만 아버지께서 선택하시어 그에게 필요한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에 그를 뽑은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좌의 권위는 하느님아버지로부터 오는 권위이지 자신의 권위가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듯이 모든 성직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권위를 부여받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권위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권위란 것이 보통 권위가 아닌 예수님 자신의 권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느님나라의 열쇠를 주시는데 그 열쇠는 땅에서 매고 푸는 하느님나라의 열쇠입니다. 하느님나라를 들어가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의 당신의 모든 권위를 베드로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곧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도 처음엔 교회로부터 공개적으로 미사를 하지 말라고 하여 삼년 동안이나 골방에서 혼자 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고 그래서 교회는 그 이후부터는 비오 성인을 자유롭게 미사하고 활동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오상까지 받은 사람이지만 교회가 자신을 왜 박해하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황과 일치하지 않는 주교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하느님나라 열쇠 사용권을 잃듯이, 주교와 일치하지 않는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는 주교로부터 그 권위를 받아 미사도 하고 죄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식으로 하나가 됩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교황과 일치하는 주교, 그리고 그 협조자인 사제와 일치해야 합니다. 사제의 뜻을 떠나서 개인적으로 혹은 몰래 행해지는 모든 신심 행위들은 물고기가 물을 뛰쳐나와 물 밖에서 물을 찾는 격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보다 성경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성경을 따르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가 성경보다 더 먼저 있었고, 성경을 정한 것도 교회입니다. 또 성경을 다 태워 없애도 교회는 존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힘도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누르지 못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남기셨던 것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이지 성경책을 쓰셨던 것이 아닙니다.성경은 한참 뒤에 쓰인 것이고 그 많이 떠도는 글들 가운데 몇 개만 정경으로 정한 것도 교회입니다. 개신교는 성경은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정한 교회는 믿지 않으니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 당신의 모든 권위를 교회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에 대항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교회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항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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