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금)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2014. 2. 15. 오전 11: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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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4일 금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치릴로 성인과 메토디오 성인은 형제간으로,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나 터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두 형제는 전례서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알파벳의 슬라브 말로 번역하였다. 두 성인은 체코 모라비아의 슬라브 족에게 파견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로마로 돌아간 두 형제 중 치릴로 성인은 수도 서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69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메토디오 성인은 교황 특사로 모라비아에서 활동하다가 885년 무렵 선종하였다

☆☆☆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
(마르 7,31-37)


He put his finger into the man’s ears
and, spitting, touched his tongue;
then he looked up to heaven and groaned,

and said to him,
“Ephphatha!” (that is, “Be opened!”)
And immediately the man’s ears were opened,
his speech impediment was removed,
and he spoke plainly.

 

 

말씀의 초대

 솔로몬의 신하였던 예로보암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든다. 그는 길에서 아히야 예언자를 만나 주님께서 솔로몬의 나라를 찢어 내어 그 가운데 한 지파만을 솔로몬의 아들에게 남겨 둘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을 때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그분께 데리고 온다. 예수님께서 그를 정성껏 어루만져 주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셨으나 사람들은 그 일을 널리 알렸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는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각 대목을 주의 깊게 묵상하면 예수님의 치유 행위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였습니다. 귀가 먹으면 쉽게 언어 장애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묘사를 통하여 복음을 읽는 우리는 조금씩 이 치유 이야기의 현실성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이 육체의 장애가 상징적인 뜻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그의 모습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며 살아가기에 제대로 된 행동을 실천하지도, 참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우리의 처지를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인물은, 성서학의 세계적 권위자 요하임 그닐카 신부의 표현처럼, 우리를 비추어 주는 ‘실재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손이라도 얹어 주십사는 사람들의 기대를 넘어 매우 정성 들여 단계별로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먼저 그를 군중에게서 떼어 놓으십니다. 그가 구경거리로 화제의 중심에 놓이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치유의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시간과 관심을 그에게 온전히 쏟으시는 모습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인격적 관계’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에파타!”(열려라!) 하고 권위 있게 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표현하는 말마디 하나하나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그 병자가 느꼈을, 조금씩 커져 가는 감동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더없는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 치유가 복음을 대하는 우리의 가슴속에서도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이 사람들을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광고를 통한 기업 홍보를 보면 이 점에 대해 더욱 더 공감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 대기업일수록 유명 스타를 내세워 자기 회사의 물건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현재까지 인기 많았던 피로회복 드링크 음료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이 피로회복 드링크가 다른 경쟁업체에 의해서 1위 자리를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이 경쟁 업체는 세계적인 스타로 유명한 인기 연예인을 내세웠고, 사람들은 그 스타가 선전한 음료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부동의 1위라고 생각했는데, 이 1위 자리를 빼앗기자 비상이 걸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회사도 경쟁업체처럼 유명 스타를 통한 홍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이 회사의 선택은 오히려 일상의 삶, 평범한 삶을 통한 광고였습니다. 즉, 보통 사람들이 느끼고 체험하는 피로를 이야기하고, 이 피로를 풀라면서 드링크를 건네주는 광고 등 일상의 삶이 묻어나는 광고를 통해 승부를 걸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빼앗겼던 1위 자리를 다시 찾았고, 현재도 일상 삶을 무대로 한 광고를 통해 여전히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 회사의 광고를 떠올리며,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이 아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움직이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이를 원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만을 체험하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는 장면을, 눈 먼 이가 앞을 보는 놀라운 장면을 직접 보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마귀 들린 사람을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구해주는 장면도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극적인 기적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더욱 더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놀랍고 자극적인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열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단순히 신체적인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마음의 귀가 열리고 마음의 혀가 풀려서 진정으로 당신께 나아오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장면에서 당신의 정성을 쏟으시면서 치유를 하시고, ‘에파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택은 명확합니다.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시네요.

“에파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목표를 갖고 그것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다.(탈레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양승국신부-

 

<허물없는 하느님>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하실 일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전지전능하신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에 죽어가던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당신 눈빛 한번으로 마귀들이 서둘러 도망갔습니다. 때로 환자가 있는 현장에 굳이 가시지 않더라도 치유가 가능했습니다. 원격 치유도 종종 이루어지던 모습이 복음서 여러 곳에 소개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묘사되고 있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조금은 의아스럽습니다. 꽤나 의외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꽤나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하십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군중에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1대 1로 마주서십니다. 그리고 몇 가지 특별한 행동을 보여주십니다.

 

당신 손가락을 환우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그리고 그 손에다 침을 발라서는 또 환우의 혀에다 대십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조금은 이상했을 것입니다. “지금 도대체 뭐하는 거야, 손가락을 남의 귀에 넣지 않나, 그 손으로 침을 묻혀 내 혀에 묻히고 이거 지저분하게 왜 이러시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대체 오늘 보여주신 예수님의 특별한 치유활동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와 직접 접촉하고자 하시는 강한 열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우리의 모습이 너무 측은하고 가여워서 우리를 ‘터치’하고 싶은 마음에 환우의 귀에 혀에 손을 갖다 대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물 많고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들을 터치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 이거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황송하면서도 은혜로운 일이며 행복한 일인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셨으면 우리와 직접 접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너무 크시고 대단하셔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하느님, 너무나 높으셔서 한 자리에 앉기 부담스러운 하느님이 나라 우리와 손을 마주잡고 싶어 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죄인인 우리와 한 식탁에 자리하고 싶어 하는 허물없는 하느님, 우리의 상처와 심각한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손을 대고 싶은 사랑과 친절의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함구령     

-안융 신부-

 

하느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눈과 귀와 코와 입을 만드셨는데, 눈과 귀와
코와는 달리 입은 하나만 만드셨습니다. 이는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느끼되 적게 말하라.’는 뜻이랍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분쟁은
십중팔구 잘못 내던진 ‘말’이 화근입니다. 이렇듯 사람의 몸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입이기에 더 조심하고 삼가라는 뜻으로 하나만 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
주시고 나서 즉시 그에게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갈
운명이었던 그가 자신에게 일어난 엄청난 사실에 대하여 더 깊이 성찰하여
깨달음을 얻지도 않고, 순간의 감동에 겨워 깊이 없이 행동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입을 닫고 들어야 합니다. 들을 귀를
가진 자만이 들어도 옳게 들을 수 있고, 말을 해도 옳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사랑을 심화시키고,
하느님 말씀에 대한 온전한 경청을 통하여 신비적 진리를 깨달은
성녀 스콜라스티카야말로 참다운 경청을 통한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침묵 가운데 열린 마음으로 우리 안에서 울려나오는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1-2 참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청각장애

-안호석 신부-


혼자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운동을 찾고 있을 때 동료신부의 소개로 수영을 배웠습니다. 수영을 배우며 귀에 물이 들어가고 그 더러운 물을 본의 아니게 먹게 되는데, 보약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다행히 배탈은 나지 않았습니다. 처음 귀에 물이 들어갔을 땐 너무 답답하고 중이염이라도 될까 싶어 물을 빼느라고 별짓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물주께서는 귀에 찬 물은 저절로 다 빠지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는 부모나 아이는 물을 빼려 면봉을 사용하다 결국 이비인후과에 가고 맙니다.
사람의 이목구비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복음은 예수님이 청각장애인을 고치셨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해 주시자 사람들이 찬양합니다.( 마르 7,37; 이사 35,5 참조 ) 이것은 예언서가 예고한 대로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청각장애인을 치유한 것은 우리에게 이로운 말만 듣고, 이웃을 배려하지 못하고, 우리의 말만 하는 장애를 넘어서 잘 들을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면 우리는 이웃을 보지 못합니다. 이웃의 말을 듣지도 못하고, 이웃에게 기쁨이 되는 말을 하지도 못합니다. 남의 말을 그대로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아는 것이 많아서 또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라 남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는 말만 합니다. 자기의 신분서열이 높아서 또는 자기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자기 말만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전혀 모르고, 자기 안에 있는 한이나 미움을 배설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우리 청각장애인에게 오늘도 “에파타 !” 라고 하십니다.

 

너무도 친밀하신 주님의 사랑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오늘 복음의 얘기는 많은 치유 이야기 중에서 좀 특별합니다.
대부분의 치유 이야기는 치유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지는데
오늘의 치유는 좀 비밀스럽고 그래서 밀교적입니다.

그런데 모든 하느님 체험은 사실 매우 개인적이고
그래서 인격적인 체험입니다.

하느님의 체험은 우선 개인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만일 하느님이 누구만을 사랑하신다면 그런 분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하시는 사랑에서는
우리가 자주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데 실패합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는데
사랑을 진하게 체험하는 데는 실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모두 내려주시는 빛에서는
빛을 받으면서도 사랑은 체험치 못합니다.

얼마 전 저는 어느 수도자를 면담했습니다.
애정결핍증 때문에 사랑을 주고받는 데 문제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근저에는 둘째 딸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보통의 둘째 딸들이 애정결핍증이 있지요.
언니보다 사랑을 덜 받았다고 느끼는 것이
사랑을 못 받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수녀님께 사랑을 정말 못 받았냐고,
부모는 수녀님을 정말 사랑하지 않으셨냐고 물으니
물론 부모는 사랑하셨고 사랑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는 다른 사랑 체험도 있습니다.
부모가 나만 따로 데리고 어디를 갑니다.
좋은 것을 모두에게 줄 수 없으니 나에게만 몰래 줍니다.
아플 때 어머님이 내 옆에 계시며 밤새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주십니다.
이럴 때 부모의 사랑을 참으로 느낍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사랑 체험의 구조가 있습니다.
나만 사랑하던지
나를 더 사랑해야 느껴지는 사랑의 구조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 체험의 구조를 극복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 체험은 경쟁적이고 독점적이고 배타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의 주님이시고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게서 하느님다운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사랑체험은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를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체험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귀에다 몸소 말씀하시고,
하느님께서 나의 손을 잡아 친히 이끄시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의
귀에 몸소 손을 대시고
혀에 당신의 침을 몸소 발라주심은 이런 인격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는 두 가지입니다.
말씀으로 창조되는 것이 그 하나이고,
하느님께서 몸소 흙을 오물조물 빚어 만드시는 것이 다른 하납니다.
한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하느님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이지만
몸소 흙을 빚어 만드시는 하느님은 매우 인격적이고 친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열려라”하고 한 말씀으로 치유하시지만
무엇보다 귀와 입에 몸소 당신 손을 대시어 치유하십니다.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이 느껴집니다.

 

 

 

 

열려라 !

- 김미자 수녀-

 

오늘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십니다. 귀는 소리를 듣는 중요한 신체 부위인데 귀가 막혀서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없다면 올바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올바른 관계도 맺을 수 없습니다. 혀가 묶여 말을 더듬는 이는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귀와 혀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중요한 신체 부위입니다.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그 답답함은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과 말하는 이도 답답하고, 자기 식대로 알아듣고 이해해 다른 행동으로 이행되었을 때 서로가 곤란하고 힘들게 됩니다.

내면의 귀와 혀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지만 내면에 있는 마음의 귀와 혀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완고한 마음과 편향된 사고로 삐뚤어져 있고, 옭아매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들어도 왜곡해서 이해하고, 말을 해도 있는 그대로 바르게 표현하지 못해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려와 그에게 손을 얹어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그를 따로 데리고 가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며 치유하신 후 “에파타
?!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정하고 친근하고 자상하게 우리와 관계를 맺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도 막혀 있는 마음의 귀와 묶여 있는 마음의 혀를 치유해 주시도록 예수님께 청하는 은혜로운 사순절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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