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7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2014. 2. 8. 오전 10:2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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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7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하고 말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6,14-29)

 

King Herod heard about Jesus,

for his fame had become widespread,
and people were saying,
“John the Baptist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at is why mighty powers are at work in him.”
Others were saying, “He is Elijah”;
still others, “He is a prophet like any of the prophets.”
But when Herod learned of it, he said,
“It is John whom I beheaded. He has been raised up.”


말씀의 초대

 집회서는 다윗의 생애를 돌아보며 칭송한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한 그를 주님께서는 용서하셨으며, 그의 힘을 들어 높이셨다(제1독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여겼다. 헤로데는 교활한 헤로디아의 계획에 말려들어 면목을 잃지 않으려고 무죄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던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집회서는 42장 15절부터 시작되는 ‘제5부 하느님의 영광’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통해 하느님을 찬미한 뒤, 44장부터는 조상들에 대한 칭송을 잇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 가운데 다윗에 관한 대목입니다. 여기서 집회서는 다윗의 생애를 회상할 뿐 아니라 그의 삶을 신앙의 눈으로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저에게 너무나 아름답고 감명 깊게 다가온 말씀은, 다윗이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는 부분입니다.
이 한 구절의 말씀에 다윗이 수많은 고통을 겪고 큰 죄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이를 이겨 내고 다시 일어나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은 먼저 자신의 생명과 인생이 하느님의 자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에 대한 그의 사랑과 의탁은 무조건적이고 어린아이 같을 수 있었으며, 임금으로서의 위신과 위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부여받은 소중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죄를 지었을 때 수치심과 절망 때문에 숨거나 권력으로 덮으려 하지 않는 가운데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느님께 모든 처분을 맡기는 모습을 보인 데서 드러납니다.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은 그럴듯한 허상을 애써 지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처와 불완전함을 자신을 지어 내신 하느님 앞에 그대로 드러내어 그 복원과 치유를 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온전하고 조화로운 삶은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 그러하듯 우리를 ‘지으신 분’의 선물입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그분의 자비를 신뢰할 때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온전한 삶을 얻는다는 역설을 우리는 다윗에게서 배웁니다.

 

회사의 가족 야유회에서 스피드 퀴즈 푸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퀴즈에 출연한 부부는 무척이나 긴장한 상태에서 아내가 문제를 내고 남편이 답을 맞혀야 했지요. 문제의 정답은 ‘칠갑산’이었습니다. 아내는 자신이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이렇게 문제를 냈습니다.

“당신이 노래방 가면 부르는 것~!”

그러자 남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답변했다고 하네요.

“도우미.”

평소의 행동이 급한 마음에 그대로 나온 것이었지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급할 때는 저절로 나오기 때문에 평소의 우리 행동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따라서 죄(罪)를 멀리하고 선(善)을 행하도록 항상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던 사랑의 삶,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란 것에 자유롭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포기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깨끗한 신발을 신었을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아마 신발이 더러워질까봐 계속해서 신경을 쓰지 않습니까? 그러다 조금씩 더러워지면 처음처럼 주의해서 걷지 않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더러워지면 진흙길도 피하지 않으면서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구 걷게 되지요.

죄도 이렇습니다. 처음에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죄책감 속에서 조심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죄책감도 무뎌지면서 쉽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판단하지 못하지요. 점점 주님의 뜻과 멀어지는 나의 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과연 행복할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죄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일화를 접하게 됩니다. 이 주인공은 헤로데 임금입니다. 그는 헤로디아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주었지요. 죄 없는 사람을 자신의 명예 때문에 죽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이 소문에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합니다.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까요? 이렇게 죄 중에 있는 것은 자신을 분명 행복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죄의 유혹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 유혹들을 거뜬하게 이겨낼 때, 저 뒤에 숨겨진 행복이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부도덕의 근원은 나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버릇에서 비롯된다.(제인 아담즈)

 

영화 ‘신과 인간’을 보고서     

-안융 신부-

 

1996년 3월 27일 새벽 1시 15분, 알제리 산골 티브히린이라는 가난한 마을에서
7명의 트라피스트 수도승과 1명의 의사가 무장한 괴한들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당합니다. 종교를 뛰어넘는 사랑을 실천하며 평화로이 살아가던
이들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알제리 정부군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행된 폭력이었습니다. 수도자들은
인간이기에 느끼게 되는 죽음의 공포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했지만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였기에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을 비장한 각오로 받아들입니다. 죽음 앞에서조차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이들에게서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요한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현실과 타협하며, 불의를 못 본체하기보다 하느님 계명을 위해 불의한 자를
꾸짖었던 세례자 요한의 올곧은 기상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갖추어야 할
진정한 시대정신이 아닐까요? 때로는 정의가 불의에 의해 유린되고,
부정이 진리를 덮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기에 희망을 지니며, 하느님의 의로우심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늘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장차 자신의 그림자마저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요한 클리마코)

 

내게 쓴소리는 예언의 말

-안호석 신부-


세상 안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의 ‘비겁함’ 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의 ‘용감함’ 이 있습니다. 사회나 교회 그리고 가정 안에서까지도 성숙지 못한 권위주의는 옳은 말을 할 때 ‘삐딱한 사람’ 으로 소외시켜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에서 헤로디아는 옳은 말을 하는 요한에게 ‘삐딱한 소리’ 를 한다고 미워하여 급기야 그를 죽게 했습니다. 헤로데는 본능에 의해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잔치에서 무모한 약속을 했습니다. 헤로데 자신은 요한을 죽이고 싶지 않았으나 ‘비겁함’ 때문에 결국 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 요한을 없애버렸습니다.

때때로 우리도 마음 편하려고 누군가를 마음에서 지워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모인 단체, 곧 가정 · 직장 · 단체 · 계 모임 등에서도 섬기는 지도력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 자리 지키는데 급급하여 권력욕이나 명예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들은 대개 비겁해집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 요한 18,37 )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던 예수님을 심문하고 재판한 빌라도나 헤로데, 카야파, 한나스도 비겁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반면 세례자 요한은 일생 동안 진리를 위해 살고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거짓과 안일보다는 진실과 죽음을 선택한 용감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나 교회에서 누군가 옳은 말을 하면 제발 ‘삐딱한 소리’ 를 한다고 듣기 싫어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쓴소리, 곧 예언의 말로 알아들을 줄 아는 은혜로움이 있었으면 합니다.

 

랑은 결코 가볍지 않다

-김찬선신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요한의 죽음은 정말 그랬을까 의심이 갑니다.
요한이 헤로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의 대가로 요한의 목이 날아간 것,
이것이 사실일까 의심이 가고,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면서도
그런 요한을 체면 때문에 죽였다는 것도 사실일까 의심이 갑니다.

그런데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은 가지만
그런 일이 불가능하지 않고 지금도 비일비재한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존재의 가벼움,
아니 존재를 가벼이 여김이 우리 안에서 비일비재하다는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취향에 맞지 않는 옷 버리듯 사람을 차버립니다.
귀찮게 한다고 사람을 외면해버립니다.
못생겼다고 사람을 미워합니다.
돈 몇 푼에 사람을 죽입니다.

존재가 감정보다 가볍고
그의 존재가 나의 가벼운 감정보다 가벼운 겁니다.
사람보다 편안함을 더 사랑하고
존재 없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꼴입니다.
생명이 몇 푼어치라는 얘기고
그의 생명이 나의 이익보다 가치 없다는 겁니다.

다 사랑이 없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사람간의 신의는 휴지조각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너의 인생과 업적은 흩어지는 연기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너의 생명은 나의 체면보다 가볍디가볍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가벼움과 반대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所重이란 “거기에 무게를 둔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므로 옳게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나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나의 체면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의 존재를 소중히 여깁니다.
돈 몇 푼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무엇보다도 사랑을 사랑합니다.
 

자유를 지켜내기

- 이진원 신부-

 

예수님이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그분의 신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분이 정말 기다리던 메시아인지, 메시아에 앞서 올 엘리야인지?…. 헤로데는 존경은 했지만 자신의 명예를 위해 처형해야 했던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던 세례자 요한이 제거되어 자유로운 듯했지만, 실제로는 평생 세례자 요한의 그늘에 살게 된 것이다.
죄의 특성이 그렇다. 마음껏 죄를 지으며 자기 편할 대로 사는 것이 자유로운 삶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죄는 그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얽어맨다. 죄를 저지른 사람은 경찰을 피해 다니고 붙잡히면 감옥에서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야 한다. 물건이나 사람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될까 봐 오히려 그것의 노예가 되어 자유롭지 못하다.

어릴 적 미사 가는 길에 놀이터에서 놀다 미사 끝날 시간에 맞춰 집에 오면 어머니는 놀다 온 것을 귀신같이 아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집에 들어온 내 눈빛만 보고 쉽사리 알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내 표정에 잘못한 것이 드러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세상을 정직하고 순수하게 살면 바보 취급 당한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당당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죄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연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과 하느님 앞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 자유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느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그 자유를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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