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3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2014. 1. 23. 오전 5: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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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3연중 제2주간 목요일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
마르코 3,7-12)

 

     Even the people who had evil spirits,
whenever they saw him, would fall down
before him and cry out,
"You are the Son of God."

 

말씀의 초대

 사울 임금은 다윗에 대한 백성의 환호를 보고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죽이려 한다. 그러나 다윗을 좋아한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피신시키고 일단 사울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 데 성공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물러가셨지만 여러 곳에서 몰려온 수많은 무리가 그분을 따라왔다. 예수님께서는 엎드려 소리 지르는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들에게 엄하게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교활함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왜곡하며 복음 선포를 교묘하게 가로막으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더러운 영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니다.
복음서에서처럼 광기를 보이며 소리 지르는 영을 일상에서 만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만,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교묘하게 가로막고 그분의 모습을 왜곡하는 더러운 영이라면 그것은 계몽된 과학 시대에 산다고 자부하는 우리 안에 오히려 더 깊이 뿌리박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 시대의 더러운 영의 작용과 관련해서 먼저 떠오르는 사실은, 현대인들이 투명하고 진실하게 하느님 앞에 서는 법을 점점 더 잊어버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러운 영의 본성이란 단순하고 투명한 진리마저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드는 가운데 그것을 왜곡하는 행위나 사고방식에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서 더러운 영을 거슬러 나를 지키고 복음에 귀 기울일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는 길은 무엇일는지요? 이렇게 성찰하다가 평생 자신의 명예와 이익에 무관심했던 화가 장욱진의 좌우명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단순하다. 나는 모든 것을 연소하고 가고 싶다.” 투명하고 소박한 그의 그림에, 진실하고 치열했던 그의 일생에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인생길 역시 예수님의 진리 앞에 단순하게 서서, 그 진리가 알려 주는 삶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살아가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의 비결에 대해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저는 이에 대한 답변을 어느 책에서 보았던 내용을 토대로 말씀드리지요.

“행복이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필요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것도 필요한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한 것 같지요. 그러나 그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해도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아서, 기존에 있던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하는 욕심을 부립니다.

저는 아침마다 운동을 합니다. 특별히 근력운동을 위해 아령을 가지고 운동을 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안에서 값싼 아령을 발견했습니다. 그것도 “1+1” 행사입니다. 문득 욕심이 생기더군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조금 무겁다는 생각과 함께 조금 가벼운 무게를 가지고 있는 이 아령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 현재 예전의 가지고 있었던 아령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롭게 구비한 아령을 가지고 편하게 운동을 합니다. 하지만 너무 가벼워서 그런지 운동이 되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새로운 것을 얻었지만, 처음보다 더 낫지 않습니다. 약간의 편함만 있을 뿐, 운동의 효과도 그렇게 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후회를 하게 되네요. “괜히 샀다.”고…….

행복은 이렇습니다. 불필요한 것들에서 자유로워질 때,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필요한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했지요.

“하나가 필요할 때에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마귀는 또 한 가지를 얻어야 한다는 유혹을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고,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 즉 마귀는 쫓겨나며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거짓말인가요?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이며, 정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정답을 말하는 마귀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왜 그럴까요? 마귀의 의도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것 자체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이것보다 하나 더 진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어 더 큰 욕심을 갖게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더 큰 욕심을 갖고 예수님을 쫓아다닐 것입니다. 즉, 더 큰 기적을 보려 하고, 그 체험의 당사자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주님께서 행동하시는 본 뜻을 사람들이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 더’라는 욕심이 생길 때,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혹시 마귀가 내 안에서 유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지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이 안에서는 어떤 욕심도 나올 수 없습니다.
증오심이 커지는 것은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보다 더 하찮은 사람으로 전락되는 것이다.(라 로슈푸코) 

 

 

주일 지내기     

-김수환 신부-

 

박 과장은 주말이면 늘 친구들과 모여 늦게까지 술을 마십니다. 그래서 새벽에
집에 들어가 주일 아침 내내 자다가 일어나 정신을 차리면 오후입니다. 이런
까닭에 박 과장은 언제나 주일 저녁미사에 참여합니다. 김 씨 부부는 낚시에
취미를 붙이면서 밤낚시를 다니게 되었는데 토요일 특전미사에 참여하고 낚시를 떠나면
다음 날 주일 오후까지 느긋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어 요즘 특전미사에만
나옵니다. 이 씨 아저씨는 아침 7시 미사에만 옵니다. 아침 첫 미사에는 신자들
이 적고 성가대가 따로 없어서 미사가 보통 사십 분이면 끝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도 위와 비슷한 이유로 미사를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당 공동체란 한 가족이기에 주일에 신자 모두가 함께 같은 미사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신자 수, 성당 좌석 수, 신자들의 서로 다른 직업과 생활양식을 고려하여
여러 대의 주일미사가 있습니다. 토요 특전미사 역시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을 지내기 어려운 신자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많은 신자들이
편리에 따라 미사시간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오그라든 손을 펴
주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주일을 지내며 우리의 상처받은
영혼과 육신을 치유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 미사로 의무를 다했다고
여긴다면, 안식일에 보여 주신 예수님의 치유 행위 조차 율법 위반이라며
예수님을 해칠 모의를 시작한 바리사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신비

-한상갑-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볼 요량으로 밀려듭니다. 치유의 기적은 예나 지금이나 매력이 있고 상품가치가 큽니다. 사도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치유기적에 매혹되어 신자가 된 마술사 시몬은 성령을 받게 하는 권능을 돈으로 사자고 덤빕니다.(사도 8장)
아흔네 살이신 제 어머니, 지금은 ‘철모르는 딸’이십니다. 언제나 자리에 누워 계시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잠에 빠지십니다. 그러다 보니 밥 먹자고 말씀드리면 늘 아침이냐고 물으십니다. 이처럼 때를 모르시니 ‘철’ 모르는 딸이 되신 겁니다.
주방이나 화장실 출입도 자유롭지 못하십니다. 하루에 한 번쯤은 침실에서 식사하십니다. 머리맡에 좌변기가 놓여 있지만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 보니 곧잘 넘어지십니다. 그래서 옆구리 통증으로 고생하십니다. 빨리 가고 싶다 하십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다섯 살배기 증손녀한테는 일 분에도 서너 차례씩 몇 살이냐고 물으시다가 핀잔을 듣기도 하십니다. 그러다가도 제가 외출한다고 인사드리면 땅이 고르지 못할 테니 단장(短杖, 지팡이)을 짚고 나가라고 이르십니다. 이런 걸 지켜보는 일이 제게는 속이 상하고 힘이 듭니다.
철을 가늠하지 못하시는 제 어머님은 다행스럽게도(?) 투덜거리고 짜증내는 저의 불효를 금방 잊으시고는 제 걱정을 하십니다. 그래서 힘들기는 하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지냅니다. 이게 바로 고통의 신비인가요? 

 

지치지 않고 일을 하는 법

-김찬선신부-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연말연시, 저희 형제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피정을 합니다.
한 해를 같이 돌아보고,
한 해를 같이 시작하는 것인데
이때 매년 말씀 사탕 뽑기를 합니다.
새 해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어떤 말씀을 내리시는지 보는 겁니다.
저는 여기에 같이 할 수 없기에
저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제 어머니께서 대신 뽑으시는데
올해는 이런 말씀이 제게 내렸습니다.

“그분께서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어 지칠 줄 모른다.”(이사 40,29)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에겐 새 힘이 솟습니다.
날개 치솟아 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습니다.”(이사 40,31)

세 번 뽑기 중 두 번이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었을 때 저는 움찔했습니다.
작년 저는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고
너무 힘들고 지쳐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지칩니까?

너무 많은 힘을 쏟았을 때이고
새로운 힘은 얻지 못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힘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 힘을 전혀 소모하지 않을 수 있다면 모르지만
무엇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곧 지치게 될 겁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지만
건강한 사람이라면 힘을 얻는 법을 알고 그리고 열심히 무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힘을 얻는 몇 가지 법이 있습니다.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억지로 하지 않고 즐겁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시키는 건 하지 않고 늘 자기 하고픈 건만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미숙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은 시킨 걸 자기가 다시 선택합니다.
적어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자세로 무얼 합니다.

다음으로는 보람되게 일을 하는 겁니다.
죽도록 일을 했는데 아무 보람이 없으면 힘이 쑥 빠지죠.
이에 비해 보람감은 우리 안에서 힘을 재생산합니다.
그러니 보람되게 일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늘 일의 보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고 실패로 끝날 수 있고,
칭찬이 아닌 비판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가 두려워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비판이 염려되는 것은 피하고 최소한의 것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건 미숙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 보람의 구조를 가집니다.

일을 하게 된 그 좋은 의도로 이미 만족하고 결과는 집착치 않으며
누구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이미 충만한 사랑으로 하는 겁니다.
이렇게 결과와 평가에 가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이고,
그것도 샘이 마르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물줄기를 마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의 샘에 대는 사람은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몰려와도,
그래서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지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하기에 다 보람됩니다.

이것이 자기 보람의 구조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 강인봉-

 

사랑하는 사람 곁에 가까이 가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마음입니다. 좀 더 많은 시간을 그 사람과 함께 보내고 싶고 그 사람의 손 한번 잡아보는 것이 무한한 행복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 온갖 나쁜 병을 고쳐주고 어쩌면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 곁으로 가까이 가려 애를 쓰게 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보다 앞서 있는 사람을 밀쳐내기도 하고 소중히 모셔야 할 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연예인을 보면 무척 피곤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바쁜 일정 중에 휴식도 취해야 하고 다음 일정을 위한 준비 시간이 필요한데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대중을 무시할 수도 없고 또 그들이 있기에 자신의 위치가 지속됨을 잘 알기에 때로는 내키지 않아도 팬들을 위해 웃음을 짓곤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보다 상대방이 편하고 행복해지도록 배려하는 일일 겁니다. 수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하셔서 그들이 자신을 밀쳐내지 않도록, 어느 한 사람에게 편중되지 않은 공평한 가르침을 주시려 애쓰십니다. 받기보다 주는 사랑을 몸소 보여주고 계신 것이 아닐지요?

얼마 전에 참석한 결혼식 주례사가 떠오릅니다. "서로 덕 보려 하지 말고 도와주려고 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뒤에 숨겨진 이기심은 없는지 잘 헤아려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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