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2일 주님 세례 축일

2014. 1. 12. 오전 10: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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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2일 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오 3,13-17)


After Jesus was baptized,
he came up from the water and behold,
the heavens were opened for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coming upon him.
And a voice came from the heavens,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with whom I am well pleased.”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알립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요구하고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 주기를 사양합니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보도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예수님보다 세례를 준 요한을 더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어, 복음서들은 그런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각각 장치들을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살아 있으며 세례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가 예수님은 세례를 요구하고, 요한은 사양하는 것 같이 보도하는 것도 그런 장치의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셨다고 말합니다. 이 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소리가 들려왔다고도 말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노래한 시편 2장에서 가져 온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오늘의 제1독서에서 우리가 들은 이사야서, 야훼의 종에 대한 노래에서 가져왔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이 구절에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구원자이지만, 이사야서가 노래한 고통당하는 야훼의 종과 같이, 하느님을 알리다가 고통당하고 돌아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다양한 세례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세례자 요한의 것입니다. 그 시대 세례 운동가들은 흐르는 물에 사람의 몸을 잠기게 하여 죄를 씻는, 일종의 정화(淨化) 의례를 행하였습니다. 그 운동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혹은 성전에 정해진 제물봉헌을 하지 못하여, 죄인이 된 사람들에게 죄를 씻어주며, 그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키는 의례였습니다.

 

요한이 행한 세례는 다른 세례운동가들이 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세례 운동가들의 세례는 필요에 따라 몇 번이라도, 죄를 씻어주는 정화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사람이 회개할 것을 약속하면서 일생에 단 한 번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일찍이 요한의 세례운동에 가담하셨습니다.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에게로 이어지는 이 회개 운동은 그 시대 유대교가 가르치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준수와 성전의 제물봉헌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지키고 바칠 것을 요구하면서 그 시대 유대교는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인,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잊어버렸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면서 심판하실 하느님을 상기시켰습니다. 후에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지만, 그 하느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자비를 사람이 실천하며 살아서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그분의 자녀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율법과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하여, 죄인이 된 사람들에게 회개하면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그와 더불어 요한은 유대교가 지닌 민족적 배타성을 배제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은 이 돌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루가 3, 9)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내세워 타민족 앞에 우월감을 갖는 관행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타민족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월감은 그 민족 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우월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유대교는 율사와 사제들의 권위를 과장하면서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일시 가담하였다가 후에 독자적인 길을 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요구하던 바를 더 발전시켜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같이 물로 씻는 의례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의 죄를 직접 용서하는 실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절대화하여 강요하던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도 가히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는 않았다.”(마르 2,27). 유대교는 질병을 인간 죄에 대한 벌이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주면서 병고가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주었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세례’라고 불렀다고 전합니다.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루가 12,50), 혹은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등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세례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깨달음과 실천은 그분을 죽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로써 사람들에게 일으킨 운동은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실천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분이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면서 그것이 요구하던 바를 당신의 삶으로 실천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 죄에 대해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당신의 실천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효도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듯이, 하느님을 믿는 것도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에 충실하였습니다. 그 실천들이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기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하느님의 것이었기에 그분은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는 부활 신앙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실천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입문 의례입니다. 결혼식이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의례이듯이,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삶을 시작하겠다는 의례입니다. 세상은 용서하지 않고, 잘못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차별하고, 높은 자와 낮은 자를 차별합니다. 그리고 높은 자와 가진 자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세상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갖지 못한 자와 낮은 자도 행복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가난한 이와 우는 이도 행복해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사는 신앙인은 그것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대가가 십자가로 돌아오더라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희망하면서 그것을 감수합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하며 아버지의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실 것을 빕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한 일은 요한 세례자에게 받은 세례였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요르단 강까지 먼 길을 오신 예수님을 뵙자 요한 세례자는 몹시 당황하며 말합니다. "제가 오히려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요…" 그러나 "이렇게 해야 하느님의 일이 완성된다"는 예수님의 강권에 못이긴 요한 세례자는 세례를 베풉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뭍으로 나오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고 하느님의 목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게 됩니다.

예수님이 받은 세례는 비단 마태오뿐 아니라 마르코와 루가, 그리고 비록 세례에 대한 언급은 정확히 없지만 요한 복음에도 등장합니다(마르 1,9- 11; 루가 3,21-22; 요한 1,29-34). 네 복음서 작가 모두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요한의 세례로 잡은 셈입니다. 그 후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사도행전에도 여러 번에 걸쳐 세례가 등장합니다(2,27-42;10,34-38;44-48;19,1-10).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入敎儀式) 그 때 성령이 선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에게 내려온 비둘기 모양의 성령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의 제1독서인 이사 42,1-4. 6-7에 보면 하느님께서 친히 한 사람을 뽑아 세운 종이 있어 만민의 빛이 되게 하리라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는 흔히 메시아 출현 예고로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예수님의 세례 받음과 연결시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이야기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역시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철저한 순종입니다. 마태오가 이끌어나가는 논리에 따르면 요한 세례자는 비록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물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며, 너무 훌륭한 분이어서 요한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합니다(마태 3,11-12).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보다 훨씬 못한 사람에게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의 순종적인 삶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능력 정도라면 물리적인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으신 분입니다. 물위를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런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마태 16,1- 14).

예수님에게는 오직 하느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의 명예나 재산도 결코 하느님을 대치하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그분에게 걸었던 엄청난 기대, 그 기대가 바로 예수님 삶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의 소신에 찬 행동의 원천은 바로 하느님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한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낼 유일한 사람이며, 하느님의 뜻이라면 요한의 세례도 마다 않는 순종의 덕을 갖추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자 하늘에서 그 일에 대단히 만족하신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며 일갈(一喝)을 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맘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의 메시아이심이 유감없이 증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한 마리의 비둘기로 성령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비둘기란 원래 떼지어 나는 짐승이란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 작가들은 마치 비둘기 떼처럼 성령이 온 하늘을 뒤덮으며 예수님에게 내려오는 웅장한 장면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이라면 사실 그 정도는 되어야 제 맛이 살아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더 내디뎌야 할 발걸음

 

-최종복 신부-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분명한 것은 '나도 세례를 받았으니 죄인인 너희들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며 무슨 본을 보이기 위해, 무슨 연극이라도 하듯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태어나신 지 삼십 년 뒤의 사건이다. 그러함에도 교회가 삼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세례사건을 성탄시기에 경축하고 있음은, 성탄과 세례가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태어나심, 즉 성탄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더 내디뎌야 할 발걸음이 있었는데 그 발걸음의 시작이 바로 세례였고, 그러기에 세례는 성탄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과거의 그 어떤 '전통에도 없는 세례'를 요르단강에서 베푼 이유는 죄인을 용서해 주기 위함이었다. 있으면 용서받고, 없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당치도 않는 율법규정에 의해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요한은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이제 죄인들은 가진 것이 없어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요르단강 진흙바닥에 발을 들여놓음으로 인해.

이제 예수님께서 그 길게 늘어선 죄인들 틈에 같이 줄을 선 것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줄을 선 것이 아니라, 줄을 선 죄인들과 같아지기 위해 줄을 선 것이다. 세상과 당신 자신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 줄을 섰고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세례는 예수님께서 세상일에 섞어들어 세상의 죄인들과 어깨를 마주 비비며 살겠다는, 세상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는 예수님의 의도적인 결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세례를 받으심으로, 세상의 혼탁한 진흙탕 물에 발을 담그심으로 참 '하느님의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왜냐하면 유혹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세례사건에 이어 유혹사건이 뒤따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유혹과 반드시 부딪쳐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나 숙제가 남아있다. 어디론가 더 내디뎌할 발걸음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두려울지도 모른다. 유혹도 따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어쩌겠는가 그 발걸음을 새해 새 출발과 함께 시작해야지. 화이팅!!!

희망의 표징인 세례
-이용화 신부-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이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는 연중시기의 첫 걸음에 있는 오늘 복음사가인 마태오는 예수님의 세례를 증언하며, 그 증언을 통해 우리들이 받은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하게 한다. 세례는 단순한 예식이 아닌 나의 인생의 길에 있어 전환점 역할을 하며, 세례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을 봉헌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삶을 봉헌하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희망의 표징이며, 나의 잘못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복음사가인 마태오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전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에 광야에서 죄에 억눌려 있는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였고, 하느님이 의로우시니 너희들도 의로워지라고 외치던 분이다. 그에게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에게 참으로 의로우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겠다고 오신 것은 난처한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난처해 있는 요한에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시편 2,7),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이사 42,1)” 는 말씀이 들려왔고, 이 말씀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의(義)를 실천할 아들로 드러났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야훼의 종’에 대해서 말한다. 야훼의 종은 우선적으로 충실한 자이며, 모든 이들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속죄의 인물이기도 하다. 이 종은 ‘정의’를 세우며 모든 이들의 ‘빛’이 되어 어두움에 갇힌 이들의 마음을 밝혀주시는 분이시다. 이 ‘야훼의 종’은 신약에서 ‘예수님’을 대변하고 있다.

제2독서에서 루가는 베드로의 강론을 요약해서 전하고 있다. 이것은 초기교회의 예비자들을 위한 교육자료로 사용되었다. 베드로는 구원의 보편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으로 올바른 사람이면 누구든지 받아들이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베드로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어두움에 있는 자들(악마에게 짓눌린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임을 역설한다.

세례는 우리에게 있어 치유와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이다. 먼 옛날 많은 이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간 이유는 자신의 어두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에서 비롯되었다. 세례를 통해서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았고,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고, 교회를 통해서 참다운 희망을 받고자 원하고 있다. 세례 받은 우리는 희망을 전달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하고, 하느님의 의(義)를 실천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강기남 신부-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란 죄를 씻기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무슨 죄를 씻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한 몸에 인류의 죄를 맡아지신 분이시며 그 죄를 짊어지시고 속죄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셔야 했으며 예수님께서 받으신 진짜 세례는 십자가 상의 죽음이었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 했던 고난의 세례(루가 12, 50)가 바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참된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맡아 지시고, 그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지극히 거룩한 피를 통해서 인류의 모든 죄가 씻겨지고, 용서받게 된 것입니다. 이 고난의 세례를 통해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없애주셨으며,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얼마나 값진 것들을 받았는지를 묵상해야 하는 축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던 그 감격스러운 순간에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맹세했습니까? 세례 성사를 통하여 남은 여생 동안 마귀의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 버리고,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느님 앞에 맹세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마귀의 존재도 믿지 않고, 무엇이 죄인지도 모르게 무디어져서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죄를 식별하는 감각이 살아 있을 때,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죄에 대한 감각은 하느님께 대한 감각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복자 오자남은 자신을 큰 죄인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아들한테 비난을 받았을 때, "아들아, 너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어떠한 지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라고 대답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체스터톤이 "성인(聖人)이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타당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원수가 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하느님을 원수로 삼는 것이며,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서 살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이고, 다음은 기도 생활입니다. 죄 짓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반대로 올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할 때 세례성사를 통해서 받았던 그 소중한 보물을 지켜갈 수 있고, 그 보물을 점점 더 불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얼마나 큰 은총을 주셨는가를 생각하면서 세례성사를 통해 얻은 엄청난 은총을 지금
까지 어떻게 잘 지켜 왔는지 우리의 지난 삶들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은 모든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그 죄들을 짓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던 세례성사 때의 그 약속을 다시 한번 새롭게 갱신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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