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2014. 1. 6. 오전 12: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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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2,1-12)

 

Behold, magi from the east arrived in Jerusalem, saying,
“Where is the newborn king of the Jews?
We saw his star at its rising
and have come to do him homage.”
 

구유의 마지막 등장인물

-박상대신부-

오늘은 주님이신 아기 예수님의 공현 대축일이다. 공현(公顯)이란 "공식적으로 나타내 보이다"는 뜻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로 드러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주님 공현 대축일은 3명의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까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와 예물을 드린 일(마태 2,1-12)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오늘의 주님 공현 대축일을 "거룩한 삼왕의 축일", 또는 "삼왕 내조(來朝) 축일" 등으로도 불렀다. 이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160-220경)가 동방박사들을 왕들로 추정한 데서 유래하며, 6세기경에는 이들 삼왕의 이름을 거론하여 "타다이다, 멜키올, 발뤼토라" 라고 불렀다가, 8세기경에는 "카스팔, 멜키올, 발타살"로 고쳐 불렀다. 중요한 것은 이들 박사들, 또는 삼왕의 방문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구유의 아기를 통하여 이들에게 공현(公顯)한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주님 성탄 대축일보다 공현 대축일이 먼저 제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3세기초까지의 초대교회가 일년 중 최대의 축일로 기념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절이며, 그 다음으로 모든 주일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거행한 것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300년경에 와서 동방교회에 의해 먼저 제정되었다. 원래 1월 6일로 지정된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공현"의 뜻을 살려 예수성탄, 예수세례,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요한 2,1-11), 거룩한 변모사건(마태 17,1-13)을 한꺼번에 기념하였다. 그후 동·서방의 지역교회는 이들 사건들을 따로 떼어 고유의 축일로 기념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313년 이후 서방교회가 "불멸의 태양신 탄일"이었던 12월 25일을 예수 성탄 대축일로 제정하여 지냄으로써 주님성탄과 주님공현을 분리시켰다. 오늘날 동방교회는 1월 6일을 주님 성탄 대축일로 그 다음에 오는 주님 세례 축일을 공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월 2일과 8일 사이에 오는 주일에 오늘 대축일을 지낸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로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유 세트에 등장해야 할 인물들이 완성되었다. 마구간 한 가운데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 그 곁에 양친이신 마리아와 요셉, 주위에 소, 양 등의 가축들과 그들이 먹을 짚더미, 천장에 매달려 있는 천사들, 막 나가려는 목동들, 그리고 오늘 화려한 왕의 복장으로 각기 황금, 유황, 몰약의 선물을 손에 들고 정중히 등장한 세 명의 동방박사들과 그들이 타고 온 말들... 세 명의 박사들 중 한 명은 때때로 흑색 피부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혹시 여기에 빠진 사람은 없는가? 물론 있다. 바로 나다.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고 맞이하면서 이 놀라운 사건을 처음부터 함께 하여 온 나 자신도 그들 속에 끼여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오늘 이 구유의 한편에서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를 보다 깊이 묵상하고 이를 종합하여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온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한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놀라운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방문사건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또한 루가복음에서와 같이 마태오복음의 전사(前史)에 속하는 대목으로써 신화적 요소를 상당히 담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성서학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역사적 사실로 증명할만한 자료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난 1,500년 동안 이 전사(前史)를 토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물론이고 비신자들까지 크리스마스 구유를 장식하여 동방박사들의 방문사건을 예수성탄 사건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신앙적 고무(鼓舞)와 제고(提高)의 기회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말씀은 "야훼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자처하던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던 예언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무관심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멀리 있는 이방인들을 불러 유다인의 왕을 찾아보게 하신 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예언자들의 말을 생전에 들어보지도 못한 이방인들이 오히려 유다인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자기들의 전통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엉뚱한 곳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보다는 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고 왕을 찾아 경배하겠다는 순박한 마음으로 신앙의 긴 여행을 시작했던 3명의 동방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오묘한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왕을 찾아 경배하겠다는 일념으로 신앙의 긴 여행을 시작했던 동방 박사들의 순수하고 착한 마음은 충분히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표본이 된다.

오늘과 같이 지도가 없던 그 당시, 먼 여행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밤에만, 그것도 맑은 밤 날씨에만 뜨는 별을 보고 그 별빛을 따라 각기 선물을 들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왕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났다는 것, 결코 쉬운 여행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여행은 필시 몹시 지루하고 피곤했을 것이며 온갖 어려움을 만나서 겪어야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 빨리 왕을 찾아 뵙겠다는 일념에 급박하고 들 떤 마음의 기쁨이 넘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대목에서 "알타반"이라는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그들은 모두 한 가닥 별빛과 그 별이 의미하는 미지의 왕에게 대한 희망과 꿈으로 부풀어 있었으니, 사실상 박사들은 자기들의 남은 인생을, 자기들의 모든 것을 미지의 왕에게 내어 걸었던 것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바로 이런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도 구유의 아기 예수께 우리의 남은 인생과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 서공석 신부-

성탄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태어난 아기는 자라서 하느님에 대해 또 우리의 구원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공현 축일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그 생명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합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오늘의 이야기는 일어난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오늘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예수님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하였고, 이교도들이 먼 이역에서 찾아 와 그분을 영접하고 경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실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활동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분의 죽음 후 그분의 가르침은 이방인들에게 실제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해 뜨는 동방에서 왔다는 박사라는 사람들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몇 명이며 무엇 하는 사람들인지, 베들레헴을 다녀서 어디로 갔는지, 후에 신앙인이 되었는지, 어느 것 하나도 복음서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잠시 무대에 나타났다가 그들의 배역이 끝나자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세 명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물이 셋으로 되어 있어서, 기원 후 500 년경부터 전래된 전설입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헤로데 왕이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놀라고 그분에 대해 적의를 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헤로데 왕은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는 음흉한 주문을 하면서 그 박사들을 베틀레헴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나 결국 아기를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말씀을 찾아 자기 길을 꾸준히 가는 사람은 말씀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태어나고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환상을 쫓기도 하면서 갑니다. 돈을 좇아, 권력을 좇아, 때로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잘났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이웃을 미워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고 마는 한 송이의 꽃과 같이 길지도 않은 인생길을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의 모상을 빚어놓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삶은 하느님의 숨결, 곧 하느님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그 숨결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허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흙으로 돌아간다...먼지로 돌아간다.”(3,19)는 말로 그 허무를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 없이 우리 삶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제 멋대로, 자기중심적으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을 자기 안에 살려서 살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오늘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떠난 박사들의 이야기는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행보를 말해 줍니다. 그들은 구원의 말씀을 찾아 별을 보고 떠났습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별 하나입니다. 흔하디흔한 별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든 자기들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아브람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났듯이 그들도 떠났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립기도 하였고, 회의에 빠져 마음이 어둡기만 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가서 길을 묻기도 하고, 그의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간교함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 그들의 정성을 바치고 우리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 다시는 말하지 않고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알아볼 길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끝내고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찾는 마음이 있고, 길을 떠나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안주하였던 온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재물이 제공하는 온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위대하고 화려한 것만 찾는 시선에 말씀의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초라한 구유에 사람이 되어 누워 계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복음서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찾는 우리가 시선과 마음을 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말입니다. 초라한 현실과 고통당하는 약자들의 모습을 외면하면, 말씀에로 인도하는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현실과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겠다는 우리의 마음이 있을 때, 별은 보이고 말씀은 들립니다. 그런 마음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계십니다.

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입니다. 초라한 현실들과 고통스런 약자의 모습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별은 빛을 발할 것입니다. 헤로데와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과 같이, 오늘의 통치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엉뚱하고 때때로 간교한 생각도, 말씀을 찾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 말씀의 별을 보고 그것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말씀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서 사는 이기심의 따뜻한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버리고 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가지고 우리와 시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줄 때, 하느님은 우리의 별이 되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런 실천들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그런 삶 안에 ‘흙과 먼지’의 허무를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숨결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며 함께 계십니다.

    기쁨 <주님 공현 대축일>(2014. 1. 5.) (마태 2,1-12)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중략)...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중략)... 그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제1독서. 이사 60,1-6)."

     

    우리 교회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일은

    이사야의 이 예언이 실현된 일로 봅니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들은 모든 민족의 대표자로서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언한 사람들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복음 말씀에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마태 2,2)'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말한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왕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을 뜻하고, 다시 이 말은 '구세주'를 뜻합니다.

    (그 당시 점성학자들 사이에는 온 세상의 왕이 이스라엘에서 태어난다는

    예언 같은 것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동방박사들이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또 몇 명이 왔는지는 모릅니다.

    (그들을 세 명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예물이 세 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 전해지는 그들의 이름은 후대에 누군가가 그냥 붙인 이름입니다.)

    '동방'은 페르시아일 수도 있고, 아라비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그들은 먼 곳에서부터 예루살렘을 향해서 힘든 여행을 했습니다.

    (그 당시 실제로 어떤 천문학적 현상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또 별이 어떻게 박사들을 인도할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고, 또 구약성경을 몰랐지만,

    그래도 자기들 나름대로 하느님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무엇을 얻으려고 그 힘든 여행을 했을까?

    그들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동방박사들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서, 또 누군지도 모르는 분을 찾아서

    그 먼 길을 힘들게 여행한 것은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의무감 때문에 한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속적인,

    또는 물질적인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무슨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기들의 어떤 소원을 빌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믿음과 희망' 때문이었고,

    예수님에게서 받아간 것은 딱 하나,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또는 마리아와 요셉은)

    동방박사들에게 세속적인(물질적인) 뭔가를 답례로 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고,

    그들도 그런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드린 예물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값비싸고 귀한 것들이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예물들은 그들 자신들의 마음과 정성을 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분명히 그들은 믿음과 기쁨과 희망 속에서 살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언했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닌 이야기와 비교됩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루카 4,42)."

     

    이 구절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루카 4,40).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다닌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자기들과 함께 있기를 원해서

    예수님을 찾아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그곳의 병자들은 모두 고쳤으니

    다른 고을의 병자들에게로 가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병을 고치는 일도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참 기쁨'입니다.

    그 '참 기쁨'이야말로 힘든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참된 힘'입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다가 미사 참례를(또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

    성당을 찾아다니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현지 주민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고,

    인터넷이나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데,

    어떻든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당을 찾는 이유가 단순히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거나,

    또는 세속적인 어떤 소원을 빌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순수하게, 오직 '예수님과 함께 있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인가?

    - 송영진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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