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7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르코 . 6,34-44)
Give them some food yourselves.
나눔의 실천
-류충희 신부-
구약 성경에도 오천 명을 먹인 이적사화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이적사화(1열왕 17,8-16)와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적사화(2열왕 4,42-44)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 담긴 뜻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엘리야나, 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인 엘리사 예언자도 위대하지만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는 성만찬례,
곧 미사의 풍요함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41절)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하신 말씀(마르 14,22)과 흡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되새기며 성만찬례를 지내던 초대교회 교우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말씀을 대할 때마다 틀림없이 성만찬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교회이며 우리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눔을 실천할 때 우리 주변에 고통 받는 이들이 없을 것이고 복음 말씀처럼
항상 먹고 남은 것도 열두 광주리가 될 것입니다.
믿음엔 계산이 없다
- 전삼용 신부-
한 번은 연세 있으신 신부님을 옆에 태우고 어디를 가던 중이었습니다. 저는 운전병 출신이고 제대 후에 아르바이트로 기사생활도 조금 해 본 경력이 있어서 어느 정도 운전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앞을 보니 주차되어있던 차가 뒤로 후진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속도를 더 내어 그 차가 뒤로 더 빠지기 전에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타 있던 신부님께서 차가 부딪히는 줄 알고 ‘으악!’하며 소리를 지르며 몸을 운전자 쪽으로 움츠렸습니다.
저는 좀 더 안전하게 차를 몰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조수석에 탄 사람은 운전하는 사람보다 더 겁을 많이 먹기 때문입니다. 저도 남들이 운전하는 차에 타면 겁이 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끔은 옆에서 놀라는 소리 때문에 더 놀라는 경우를 자주 겪게 됩니다. 나는 안전하게 운전한다고 생각을 하는데도 상대는 그렇게 비명까지 지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무래도 운전자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이 가엾어 보여 시간이 늦도록 많은 것을 가르치며 일깨워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걱정이 점점 깊어집니다. 왜냐하면 더 늦어지면 남자만도 5천명이나 되는 이들이 모두 쫄쫄 굶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급기야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저는 이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
‘그런 것은 너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인데 너희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쓰니, 그렇다면 너희들이 한 번 알아서 해 보아라.’
제자들은 계속 세속적인 계산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 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제자들은 이미 그 인원을 먹이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다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의 계산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세상의 계산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자 제자들은 “우리가 빵을 가져오지 않았구나!”하며 서로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빵의 기적의 의미를 설명해 주셔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눈치를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빵이 없다고 걱정들을 하다니, 너희는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아직도 모르겠느냐?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이나 먹이고도 남아서 거두어들인 것이 몇 바구니나 되었느냐?” (마태 16,8-9)
결국 우리들이 세상 걱정을 하는 것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완벽한 운전수입니다. 옆에 타고 있는 우리들이 우리 자신들의 실력으로 하느님을 판단하기 때문에 위기를 느끼고 걱정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지금 경제가 매우 어려울 때입니다. 아마 그래서 봉헌이나 십일조를 하기가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가 하느님보다는 우리의 계산을 더 믿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예수님을 오롯이 믿기 보다는 자신들의 계산을 더 믿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보아야하겠습니다.
생산자 부담의 원칙
-박상대신부-
예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베푸신 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언제 들어도 신명나는 일이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여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마르코복음뿐 아니라 4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다.(마태 14,13-21; 마르 6,32-44; 루가 9,10-17; 요한 6,1-15) 이 기적에서 예수께서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남자만도 5,000명을 먹이셨다. 그런데 마르코와 마태오는 또 다른 빵의 기적을 전하고 있다.(마르 8,1-9; 마태 15,32-39) 이 대목은 예수께서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000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셨다고 보도한다. 빵과 물고기의 숫자와 배불리 먹은 사람들의 숫자를 빼고는 두 기적사화가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 먹고 남은 조각들을 모두 모았더니, 첫 기적에서는 12광주리(마르 6,43)가 가득 찼고, 두 번째 기적에서는 7광주리(마르 8,8)가 가득 찼다고 한다. 가득 찼다고 하는 말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넘치도록 풍성하다는 뜻일 것이다.
성서학자들 중에는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들을 모았더니 12광주리와 7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말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 12광주리는 이스라엘의 12지파(창세 35,23-26; 민수 1,5-49)를 가리키는 상징으로써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온전히 재건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7광주리는 전성기 구약시대, 즉 여호수아가 점령한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나누어주고 난 뒤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였을 당시에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주변의 일곱 나라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일곱 나라가 정확히 어떤 나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세계와 전인류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이 빵의 기적을 두 번씩 보도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이 구세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제적인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의 실재(實在)는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으로 드러난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말씀은 영적(靈的)인 양식이요, 기적은 육적(肉的)인 양식이다. 육적인 양식으로서의 기적은 병자들의 치유와 일용할 양식으로 베풀어진다. 빵의 기적은 곧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일용할 양식이 어떻게 베풀어지는 것인지를 가르쳐 준다. 예수님의 손에 올려진 양식은 성자(聖子)의 감사기도와 성부(聖父)의 축복으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일용할 양식을 자신의 힘으로 벌어먹는다고 하지만 원초적으로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선물이다. 일용할 양식은 곧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생산자 부담"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37절)고 하셨지만 결국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심으로써 "생산자 부담"의 원칙을 지키셨다. 되도록 "사용자 부담", "수신자 부담", 또는 "소비자 부담"에 익숙해 있는 우리 인간들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생산자 부담"의 원리를 배워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에 대한 "생산자 부담"의 원칙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