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요한 1,35-42)
‘Rabbi, where are you staying?’
Jesus said, ‘Come and see’
곁에 머물면서
-구요비 신부(가정선교회 담당신부)-
우리나라의 해외 여행자 수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방학 동안 배낭여행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로 되었고, 신혼여행도 많은 경우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국내 자산이 외국으로 유출되기에 우려하는 소리도 높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손실만을 문제삼는 것보다 우리가 외국의 문물과 생활을 대하면서 얻게 되고 배워오는 부과효과도 크다고 보야야 하겠다.
고사성어 중에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종교의 영역에도 해당되니, 무릇 모든 종교의 본질은 인간이 절대자인 신을 만나뵙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뒤를 따라오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을 보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당신을 애타게 찾는 갈망을 심어놓으셨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2).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여, 당신의 품안에 쉬기까지 내 영혼은 이렇게 불안하나이다!” 하고 기도했다.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향수와 목마름에 대해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 하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무엇을 보고 어떤 체험을 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류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는 메시아를 만났다는(41절) 제자들의 고백이다.
감동은 나누는 것
-김귀웅 신부-
취미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제주도 곳곳이 아름답다 보니 제 실력과는 상관없는 아름다운 사진을 많이 찍게 됩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관광객들은 다니지 않는 특별한 곳도 많이 찾아다닙니다. 이른 새벽이나 어스름 저녁에 그런 예쁘고 멋지고 아름다운 곳을 찾아 나서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러 갈 때는 혼자 다닙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똑같이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인데, 혼자서 볼 때와 여러 사람이 함께 있을 때의 느낌이 왜 다른 것일까?
사실 혼자보다는 옆에 누군가가 있을 때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우와, 멋지다!”라고 감탄하며 맞장구칠 사람이 있을 때, “어머, 얘 저것 좀 봐!” 하며 옆 사람 어깨를 토닥토닥거릴 때 훨씬 큰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누군가와 나누어야만 더 좋은 것, 더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안드레아가 메시아를 만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형 시몬을 찾아가 이야기하고,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한다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우리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고, 누군가를 예수님 곁에 데리고 옴이 당연한 것이겠지요.
1월 4일의 복음 말씀은 요한복음 1장 35절-42절, '첫 제자들'인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안드레아와 또 한 명의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안드레아가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앞부분에서 예수님과 두 제자가 주고받는 대화가 뭔가 좀 동문서답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대화를 내용에 따라서 재구성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저희는 메시아를 찾고 있습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나를 따라오너라."
"무엇을 찾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마태 7,7)."
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메시아를 간절하게 찾았고, 그래서 만났습니다.
여기서 찾았다는 말은 기다렸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들은 그냥 소극적으로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서 내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메시아를 찾아다니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아가 원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1,35),
그가 요한의 제자가 된 것도 메시아를 만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세례자 요한이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23)." 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어부들을 만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과 합해서 생각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함께 묵은 일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호숫가에서 정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느닷없이 얼떨결에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상태에서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스승과 제자가 된 일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
가 작용한 일이고(하느님의 계획대로 된 일이고), 동시에 제자들 쪽에서도 간절하게
원하고 노력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 된 일도, 또 넓게 생각하면
복음을 선포하는 일도, 하느님의 구원 사업 자체도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도 간절하게 원하고 찾고 노력해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아무나 붙잡아서 하느님 나라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가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잔치 참석을 거절했습니다(마태 22,3).
그들은 참석하기를 거절함으로써 스스로 쫓겨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길거리에서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혼인 예복을 입고 있지
않아서 쫓겨납니다(마태 22,13). 반대로 생각하면 그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혼인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뜻이 되고, 혼인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은 초대받기
를 기다리면서 길거리에 서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36)." 라고 말했을 때, 만일에 제자들이 그저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무심하게 흘려들었다면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안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든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고,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
를 만났소(요한 1,41)." 라고 증언했고,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이것은 베드로도 메시아를 찾거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안드레아가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다는 말을 한 것은 단순히 사실을 전한 일이
아니라 '기쁜 소식(복음)'을 전한 일이었습니다.
메시아를 만난 자기의 믿음과 기쁨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시키신 일이 아닙니다.
믿음과 기쁨이 가득 차고 흘러넘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베드로도 마지못해서 끌려간 것이 아니라
기대감과 기쁨에 가득 차서, 또 흥분한 모습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의 모습은 마치 동방박사들이 기쁨에 가득 차서(마태 2,10) 베들레헴으로 가는
모습과 같았을 것입니다.
'기쁨'은 신앙생활의 중요한(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만일에 기쁨 없이 의무감으로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