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1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2-30)
The one
who has the bride is the bridegroom;
the best man, who stands and listens for him,
rejoices greatly at the bridegroom’s voice.
So this joy of mine has been made complete.
He must increase;
I must decrease
아름다운 퇴장을 위하여
-남상근 신부-
예수님에 앞선 선구자,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이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인 세례자 요한. 요르단 강물로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그가 이제 역사의 뒷면으로
물러납니다. 이미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기뻐 뛰놀며 잉태된 말씀을 알아보았고,
자신이 베푸는 물의 세례가 아니라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분이 오시리라 예고하였으며 나아가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조차 풀 자격도 없노라 하였던
세례자 요한. 그가 주님의 길을 다 예비하고 나서 퇴장하는 것입니다.
점점 커지셔야 하는 분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드리면서 물러서는 의연함.
정말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하고 또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인간 세상에서 자기 자리가 아님에도
차지하려고 벌어지는 이전투구와 한번 장악하면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는
추하고 치졸한 탐욕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물러섬이 없는 사회’의 잔인함을
느끼곤 합니다. 마치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듯, 홀연하게 또 품위 있게
떠나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은 당당한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아름다운 사람, 세례자 요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는 곳과는 다른 장소에서 세례를 베푸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새로운 스승이신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며 질투를 느끼며, 심지어는 자신의 스승이 무능하게 취급당하고 사람들한테 무시당하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런 현상을 보고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담담하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 이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복음의 전달자일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알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진실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어찌 보면 겸손 자체가 세례자 요한의 영성이라 하겠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돋보이기 위해 자신을 낮춥니다. 그래서 겸손이 모든 덕목의 기준이자 시금석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 나로 인하여 주님의 모습이 드러납니까 ? 나를 통해 주님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는 지극히 겸손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어찌 보면 겸손이란 현대인들이 지키기에 너무 힘든 덕목이 아닐까요 ?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면 사회 속에 묻혀 버린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사회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하지만, 나의 커짐만을 바랄 뿐이지 주님께서 커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점점 커지고 주님은 점점 작아지다 못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나의 겸손이 작아질수록 주님 역시 작아질 것입니다. 우리의 오만이 주님께 죄스러울 뿐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어도
-김찬선신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오늘 요한의 편지는 죽을죄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런데 죽을죄란 어떤 죄입니까?
일반적으로 죽을죄란 그 죄를 지으면 사형에 처해지는 죄입니다.
논란이 있지만 사형에 처하는 판단기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죄가 너무 클 뿐 아니라 죄질이 아주 나쁘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개과천선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크고 나쁜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 죄가 되풀이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죽을죄란 그러면 어떤 죄입니까?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사람이 죽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고,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사형은 안 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인데
하느님 앞에서 죽을죄가 있다고 오늘 편지는 말하는 것입니까?
복음의 가르침을 놓고 볼 때 죽을죄란
과거 지은 죄의 크고 나쁨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도 하느님의 용서보다 크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런 큰 죄인의 회개를 더 기뻐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죽을죄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도 바라지도 않고
그래서 회개 없이 스스로 죽어가는 죄입니다.
하느님께 용서의 기회를 드리지 않는 죄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살 것입니다.
특히 다윗처럼 하느님께 죄를 지었고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하면 오히려 살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의 죄는 참으로 크고도 큽니다.
임금이었으니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하였겠습니까?
바세바와 간음죄를 지은 것으로 부족하여
그 남편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지었으니 죄질이 아주 나쁩니다.
그러나 그 죄를 나단이 깨우쳤을 때
다윗은 바세바나 그 남편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고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느님 사랑과 용서 안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실제로 우리는 신문을 통해 흉악 죄를 지었지만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얘기를 간간이 듣습니다.
그는 죄에 머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 매이지도 않고 하느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요한이 편지에서 얘기하는
하느님 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이고,
이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는 한에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란 하느님을 거부하고 떠나는 것인데
하느님 안에 있으니
하느님을 떠나 자기 안에 갇혀 있지도 않고
하느님을 떠나 세상 안에 머물지도 않겠지요.
아! 그러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여주헌신(與主獻身)
- 이영선 신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자신의 삶의 목적과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분명하게 살며 말하는 세례자 요한의 이런 증언을 들으며 생각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주헌신(與主獻身)
'경축 이영선 신부님 사제서품. 여주헌신 자애목자 기원'
'우리 주님처럼 몸 바쳐라.
우리 주님을 위해 몸 바쳐라.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라.'
이런 뜻으로 알아듣는 말씀입니다.
사제수품 때 선친께 받은 선물입니다. 하나 있는 아들이 사제품을 받는 날 붓글씨로 써서 표구까지 해서 선물이라고 건네셨습니다. "사제수품 축하한다." 하시면서요. 보는 순간 아찔했습니다. 사제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너 알아서 해라." 찬성인지 반대인지 애매한 말씀 때문에 맘고생 꽤나 했는데. 선배 신부가 신학생 때 "부제품 받아 봐야 알지." 부제품 받고 오니까 "서품 받아 봐야 알지!" 하신 분이.
중요한 제 짐입니다. 가지고 다니며 벽에 걸어놓고 가끔 보는데 그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합니다. 오늘처럼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사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들으면 어김없이 정수리를 꿰뚫고 들어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교회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살게 지켜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하는 사람인지 알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