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오너라.
(마르 1,14-20)
Come after me,
믿음과 확신
-김찬선신부-
저는 성공과 실패의 차원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고
무엇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점에서 단층적으로 보면 그것이 전부이고 끝인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굳이 실패한 것이 있다면 젊은이들과 관련한 것들입니다.
제 조카들 중에 하나라도 수도자로 만들고 싶었는데
열 셋 중에 아직 한 놈도 수도자가 된 놈이 없습니다.
아직 여섯이 남아 있긴 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한 것 같습니다.
조카들이 제 기대를 배반한 것도 있지만
제가 조카들을 적극적으로 끌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생활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 것 사실이지만
그만큼 쉽지 않고 실패율이 높기 때문이고,
제가 아는 한 조카들도 영 미덥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패는 조카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제가 흑심을 품었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흑심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놈 잘 키워서 수도자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색은 하지 않고 공을 들였는데
어느 날 ‘저 시집가요, 장가가요’하고 휭 떠나버립니다.
오늘 복음의 부르심 얘기를 묵상하면서 저를 반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다 알고 계셨을 텐데
그럼에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부르셨는데
저는 제 조카들을 인간적으로 따져보고 끌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하느님께서 뽑으시고
하느님께서 키우시고
하느님께서 이끄시고
하느님께서 힘주신다고 말로는 하면서
실제로는 그런 믿음으로 하느님께 조카들을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저에 비추어
고기를 낚는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들로 만들겠다는
예수님의 그 믿음과 확신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제자들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제자들, 나중에 확인되었듯이 그리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
제 조카들이나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란
고기 낚는 어부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또 그렇게 되게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자기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당신의 헌신의지가 합해져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엇에 대한 확신을 갖고자 한다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은총에 부응하는 우리의 헌신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믿음과 확신으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아침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전삼용신부-
제가 보좌 신부를 할 때 순교복자회 본원에서 지, 청원, 수련자들에게 성경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는 성경을 전공했기 때문에 로마에서 함께 공부하던 수녀님을 통해 부탁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첫 해 보좌 생활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좀체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사제의 불타는 열정으로 해 드리겠다고 수락했고 결국 쉬는 날인 월요일 아침마다 강의를 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한 이유는 월요일은 사제가 쉬는 날인데 그 때마다 이런 저런 사제들의 모임이 많았기에 아침 일찍 하지 않으면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일까지의 피곤한 일정을 마치고 월요일은 아침미사 하고 한 숨 자는 것이 꿀맛이었는데 그 주간부터는 새벽미사가 끝나자마자 차를 몰고 서울 청파동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매 주 한 시간 반의 강의를 마치고 내려오면 간신히 동기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월요일 날도 쉬지 못하니 정말 피곤할 것 같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제관에서 오전 내내 잠을 자던 때보다 더 힘이 났습니다. 그래서 유학을 다시 나오기 전까지 거의 2년을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그들에게 강의를 하였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힘들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사실 신자들에게 강론시간에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말 깊은 부분과 자세한 부분들은 일일이 강론에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시간도 부족할뿐더러 신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 한다던가, 관심 없어 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강론은 쉽게 핵심적인 것을 삶에 비추어 해야 합니다. 그래도 어려워하거나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되겠다고 앉아있는 그 자매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보물을 발견한 것과도 같습니다. 쉬지 않고 한 시간 반을 이야기해도 열심히 받아 적고 질문도 하는 등 가르치는 사람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사실 신자들에게 얻을 수 없는 만족을 그들을 통해 얻었었습니다. 많은 신자들도 힘을 주는 말씀을 많이 해 주셨지만, 그이들이 주는 만족은 그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서 더 ‘제자들’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시작하시며 첫 네 명의 직업이 어부였던 이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저는 그 자매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왜 복음 선포를 시작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부르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물론 당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아 그들을 온전히 당신의 후계자로 가르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입니다. 당신이 수난하시는 날까지 제자들은 완전하게 되지 못하여 모두 도망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큰 위로가 되었음 또한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을 제자들에게만 따로 설명해 주시는가하면 제자들과만 함께 계실 때 특별한 것들을 더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 (마르 4,36)
“예수의 일행이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마르 9,30-3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숨겨진 말씀들을 따로 해 주시며 만족하시고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실 때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제자들만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어렵다고 모두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셨지만 끝까지 당신께 남아있는 제자들을 보며 위로를 받으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열심히 배워 제자가 된다는 말은 곧 사랑한다는 말이고 스승에게 커다란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스승’이라 불려야 합당한 분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제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란 스승과의 더 깊은 가르침을 통해 끈끈한 통교와 사랑의 관계를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습은 항상 우리가 따라야하는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시작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뽑아 함께 지내시며 가르치셨습니다. 그것도 12사도와 72제자들만을 뽑으셔서 그들에게 특별교육을 하셨습니다. 가르친다는 것, 또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 관계를 넘어서서 사랑의 관계입니다. 제자들은 교회를 의미하고 스승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자녀가 가장 큰 재산이라면 우리 신앙인은 자신의 제자들이 가장 큰 재산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당신의 제자들이 더 늘어나기를 원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보며 기뻐하십니다. 이제 사람 낚는 어부를 부르는 몫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는 몫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차지하시는 분은 유일한 스승,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신앙인
- 경규봉 신부-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여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에서 남편의 다른 아내 브닌나로부터 시기와 질투,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할 때 자칫 브닌나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악한 마음을 품기 쉽다.
그렇지만 한나는 브닌나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워서, 수치심과 무력감에 빠져 목 놓아 울었을 따름이다. 이렇게 목 놓아 울던 한나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아이를 낳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무력감에 빠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며 울고 있어서만은 안된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제사상을 물리고 난 후에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다. 물론 전에도 아버지 하느님께 아이를 낳게 해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자신이 기도한 결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한나는 자신이 기도함으로써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아이를 낳는 것은 주님의 은총과 자비의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자신은 다만 갓난아이처럼 주님의 자비를 간구한 것이다.
그녀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가 하는 것은 사제 엘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주정을 하고 있을 참이냐? 어서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겠느냐?” 하고 꾸짖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는 마치 술에 취한 듯이 기도에 취해 있었고, 기도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녀를 어여삐 보시고 그녀에게 아들을 잉태하게 해주셨다.
다른 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는 악한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알고 고백할줄 아는 사람, 자신이 무력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는 사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되 최선을 다해 맡기는 사람, 갓난아이가 어머니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탁하며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
그들이 곧 신앙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