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1,29-39)
He cured many who were sick with various diseases,
and he drove out many demons,
Rising very early before dawn,
he left and went off to a deserted place,
where he prayed.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사무엘을 처음 부르셨을 때 그는 엘리 사제의 목소리로 생각하였다. 엘리는 나중에 그 목소리가 주님의 부르심인 줄 알아차리고 사무엘에게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라고 이른다. 이윽고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병으로 몸져누운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신 뒤 많은 사람을 치유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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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 나오는, 소년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가 세 번이나 주님의 목소리를 엘리 사제의 소리라고 착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각자가 주님께서 부여하신 고유의 소명을 알아듣는 데 겪는 보편적인 어려움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 시대를 사는 나에게는 성경의 인물들과는 달리 주님께서 개인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라며 답답해하거나 야속해하곤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대예언자 사무엘 역시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응답의 순간까지 착오와 노력의 과정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위로가 됩니다. 구약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의 시간적 간격과 문화적 차이는 당연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주님께서 내리시는 고유한 소명을 찾으려는 갈망을 가지고 살되, 그 갈망이 분명한 길을 발견할 때까지 때로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시인이자 사제인 호세 토렌티노 멘도사는 사무엘 예언자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에”(1사무 3,3)라는 부분에 특히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는 우리가 분주한 세상과 내면의 혼동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놓치고 있는 시기를 지낸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고유한 소명을 밝히는 하느님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은 채 우리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용기와 인내를 잃지 않고 그분을 향한다면 반드시 그분의 등불을 우리 마음에 점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김대열신부-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코1,35)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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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 병을 치유 받았다고 성서는 전한다.
그분을 체험한 많은 이들이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더 머물러주시기를 청한다.
어느 곳에서는 예수님을 왕으로까지 세우려 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대로 또 다른 길을 재촉하신다.
머리 둘 곳조차 없이 떠돌아다니셨던 삶.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분인들 왜 쉬고 싶지 않으셨을까?
며칠 더 쉬면서 여유를 부린들 복음의 역사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움직이셨다.
일을 마치시고 피곤이 극도로 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홀로 기도를 하셨다.
그리고 떠나실 것을 결정하신다.
머물 때와 떠날 때를 아는 것, 이것 역시 우리가 실천하기 힘든 지혜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타고난 어리석음은 들어갈 때와 나갈 때를 식별하지 못하게 한다.
그분께서 몸소 보여주신 모습, 그것은 기도였다.
철저하게 하느님과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둘만의 시간에 익숙하지 않다.
뭔지 모를 부담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본능의 요구가 강해질 때,
선과 악의 식별이 어려울 때,
지능적인 유혹이 다가올 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기도이다.
그리고 우리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진실한 기도를 하는 자는 실패하기 힘들다.
아니 실패를 하더라도 선한 결과를 체험한다.
< 바다와 같은 사람 >
-전삼용신부-
제가 25세가 되었을 때, 신학교에 갈 것인지 아니면 지금 가던 길을 계속 갈 것인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대답을 주지 않을 때 대천 앞바다에 옷을 입은 채 그대로 뛰어들었습니다. 겨울이었고 밤이었고 술 한 잔 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다는 대답을 해 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자살하러 물속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 추운 겨울에 저와 함께 갔던 사람들이 옷을 입은 채 절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신학생 때 무작정 떠나고 싶은 적이 있었습니다. 방학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즐겁게 놀아도 무언가 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다였습니다. 부모님께 말도 안 하고 그냥 가방을 메고 무작정 강릉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도착하니 너무 늦은 밤이라 숙소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경포대 해변에서 아침을 기다리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동이 터 올 무렵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불덩이가 바다에서 치솟았습니다. 모래사장 위에서 아침 성무일도를 바쳤습니다. 기도의 맛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을 떠나 바다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다를 보는 눈은 인생을 보는 눈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도 합니다. 아침 녘 바다를 좋아하면 인생의 시련을 많이 겪은 사람이고, 석양 무렵 바다를 좋아하면 인생을 낭만적으로 여기는 사람이고, 밤바다를 좋아하면 인생에 당당하고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참조: 내 인생의 화양연화, 123] 그러니까 바다는 인생의 어려움을 뚫고 힘겹게 도착한 사람에게도 인생을 낭만적으로 산 사람에게도 모험하며 산 사람에게도 모두에게 사랑받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바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바다의 모양은 수없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해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혹은 기쁠 때도,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도 사람들은 바다를 찾습니다. 왜 바다는 그렇게 사랑을 받는 것일까요? 아마도 모두를 품어줄 수 있는 넓은 가슴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도 보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찾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 주시고 고통 받는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즉 행복한 소식을 전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다 품에 안으셨습니다. 바다와 같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가장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저는 신자분들이 저를 만나기를 원한다면 언제든 오라고 합니다. 마음이 넓어서라기보다는 본당을 더 이상 맡지 않기 때문에 혼자가 될까 두려운 마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나를 잊고 찾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그러나 실상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오라고 하시지 않고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쫓아다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외로워질까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바다는 그냥 바다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좋아해 주고 찾아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을 많은 이들이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일을 합시다.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다른 이웃 고을에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김기현신부-
지난 주일에 있던 본당에서 마지막 주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강론 때 지난 사진들을 보여주고 담담하게 마지막 공지사항을 하고 나서, 성가대가 불러주는 노래를 들었는데요. 갑자기 나도 모르게 막 눈물이 났습니다. 창피해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원래 울보 아니십니까?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본당을 떠날 때나 학교를 졸업할 때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엔 이상합니다.^^; 같이 일하고 먹고 자고 하다 보니 정말 식구처럼 정이 많이 들었나봅니다.
떠나는 날도 되도록 울지 않으려고 딴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신자들 얼굴 보면 눈물이 나고, 풍경 보면 또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바보처럼 많이 울었던 거 같습니다.
가만 두면 수도꼭지 틀어놓은 것처럼 계속 눈물이 나올 거 같았는데요. 곧 도착할 신자들이 보면 좋지 않을 거 같아서, 마음을 추스르고 옆에 분하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딴 이야기를 하다보면 눈물도 멈추지 않을까.. 해서 이야기에 집중을 했죠. 그리고 새로운 본당에 도착해서 마중 나오신 신자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차려주신 식사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사제관에 혼자 들어갔는데 또 마음이 진정이 안 되더라고요. 전 본당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면서 막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을 볼 수도 없고, 그 일을 진행할 수도 없음이 슬프더라고요.
짐정리도 못하겠고 가만히 있으면 견딜 수 없고 해서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는데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래 첫 본당을 떠날 때는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가.. 떠나기 힘든 건가..’ 그런데 물어볼 사람도 없고 좋은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도 주위에 없더라고요. 마음잡기가 힘들었는데요. 오늘 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만이 아니라 떠나가고 만나고, 또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고 만나는 일이 반복되어야 하나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일에 성실하셨던 거 같은데요. 저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실 거 같습니다. ‘다리가 연결된 이웃 섬에 가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너는 그 일을 하려고 신부가 되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전 본당을 생각하면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데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렇게 마음도 잡지 못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음도 쓰지 않는 모습이 아닐 거 같습니다. 새로 심긴 그 자리에서 열매를 맺고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실 겁니다.
오늘 하루, 익숙한 자리를 떠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생각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