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7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2014. 1. 17. 오전 2:2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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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7연중 제1주간 금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를 따르자 그는 수도원을 세우고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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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2,1-12)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him,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사무엘에게 임금을 세워 달라고 요구한다. 사무엘은 임금의 횡포로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임금이 전쟁을 이끄는 다른 민족들을 부러워하는 이들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제1독서). 카파르나움에서 사람들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간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죄의 용서는 곧 치유라는 사실을 율법 학자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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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죄의 용서와 치유가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이 구원이 드러나는 자리임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우리 삶에서 구원을 가장 직접적으로 실감하게 되는 사건은 바로 용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았음을 깊이 깨닫고, 그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다른 이를 용서하는 행위를 할 때 우리는 구원을 실제로 살게 됩니다. 그 반면에 용서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심지어 용서가 불가능하다고까지 느끼는 순간, 주님의 온전한 구원과 치유에 대한 믿음 역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지난 가을에 본 연극 한 편의 강한 인상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러시아의 한 극단이 영국의 유명한 연출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공연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폭풍우)였습니다. 놀라운 연기와 신선한 연출에도 감탄했지만 무엇보다도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서 남긴 ‘용서’라는 주제를 다시 음미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연극의 뒷부분인 에필로그에 나오는 주인공 프로스페로의 마지막 대사는 용서만이 인생의 행복을 다시 찾는 길이라는 작가의 마지막 확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부릴 정령도 없고/ 걸 수 있는 마술도 없고 해서/ 기도로 구원되지 않는다면/ 저의 마지막은 절망이 됩니다./ 기도는 뚫고 들어가 자비를 움직여서/ 온갖 잘못을 용서합니다./ 여러분도 죄를 용서받으시려거든/ 관대하게 저를 놓아주십시오.”
우리는 용서가 때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과, 그러나 용서하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는, 이 두 가지 모순된 사실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프로스페로에게 용서가 삶을 건 도전이었듯이 우리에게도 용서는 그것을 감행할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것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어 우리가 온전하게 치유받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걷는 우리의 삶이라면, 용서의 힘은 분명히 우리 안에 소리 없이 자라나 있을 것입니다.

 

< 뭉치면 강하다? 뭉쳐야 산다. >

-전삼용신부-


   얼마 전 우연히 TV를 보다가 남극의 펭귄이 겨울을 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여자 펭귄은 아기 펭귄을 낳고 남자 펭귄들에게 아기를 맡기고는 모두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떠나버립니다. 남극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기 펭귄들을 데리고 각자가 살아남으려고 먹을 것도 없이 몇 달 동안 계속되는 어두운 겨울을 단 한 마리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기 펭귄을 다리 사이에 끼고 서로 몸을 최대한 밀착시켜 추위와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달 동안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봄이 찾아오고 그 때 암컷들과 교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뭉치면 강하고 흩어지면 약해진다는 것을 많이도 듣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이 동물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절대 절명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기러기는 또 어떻습니까? 몸집이 커서 혼자서는 절대로 이동할 수 없는 엄청난 거리(3km)를 함께 이동하여 얼어 죽지 않습니다. 그들은 V자 형태로 나는데 맨 앞에 한 마리가 앞장섭니다. 그렇게 나는 이유는 앞에서 바람을 막아주면 뒤에 따라오는 기러기들은 약 1/3정도의 힘이 덜 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의 기러기가 힘을 내도록 뒤에서 소리를 질러주고 또 앞의 기러기가 지치면 뒤에서 차례로 교대를 해 줍니다. 이들 또한 생존하기 위해 함께 해야 하는 법을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뭉칠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혼자서는 절대로 인간답게 살 수 없습니다. 늑대인간의 예에서 보듯이 인간은 함께 살아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함께 뭉칠 필요는 있을까요?

예수님은 둘이나 셋이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이면 당신도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당신 뜻으로 모여야만 더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로 사랑해서 함께 살기를 그렇게도 원해서 결혼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둘도 마음이 맞지 않아서 어떤 때는 결혼을 후회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큰 유대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이혼 등으로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뭉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제가 교구청에서 관심 가져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소공동체활성화입니다. 그러나 잠깐 본당에 있으면서 느꼈던 것은 소공동체가 좀처럼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전국적인 어려움입니다. 서로 직장도 연령도 학식도 관심도 다른 이들이 신앙 안에 모여서 함께 한다는 것이 저로서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더욱더 개인적인 성향이 두드러져 서로 집을 개방하려 하지 않으려 하고 마음에 조금만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소공동체가 활성화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뭉치면 강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네 명이 한 명을 들것에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고,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가 아닌 같은 뜻을 지닌 그 네 명의 믿음을 보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나 두 사람만이 그 병자를 데려오려 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억지로 들것을 끌고 올 수는 있었겠지만 지붕까지 나르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내는 일은 둘의 힘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네 명이 최소 인원인 것입니다.

결국 함께 모이기 위해서는 그 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네 사람은 같은 뜻이 있었습니다. 이 뜻이 함께 모이게 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뜻으로 함께 모여야 할까요? 바로 복음전파가 아닐까요? 그 뜻이 퇴색되고 다른 목적들이 들어오면 가장 중요한 뜻이 사라져버려 함께 하려는 힘이 약화됩니다. 함께 모여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는 이를 힘을 합쳐서 그분께 데려오려는 이유여야 합니다. 결국 모임이 잘 되게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가 복음 선포이고 그 복음 선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해야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인식이 뿌리깊이 박혀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는 죽은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뜻을 위해 뭉쳐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펭귄이나 기러기들이 살기 위해서 뭉치는 것처럼 우리도 강하기 위해서 뭉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뭉쳐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들도 오늘 복음의 4명처럼 예수님께 오지 못하는 이들을 데려올 수 있는 그런 살아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치유의 용서     

-김수환 신부-

 

세상에선 교활하고 악한 자들이 더 잘사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악행의 첫 번째이자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그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악행 자체가 악을 행하는 사람의 인간됨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악행을 당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일부에만 해악을 입게 되지만,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악하게 변하므로 안팎으로
해악을 자초합니다. 이렇게 보면 정의는 늘 구현됩니다. 악행을 한 사람은 자신
을 망가뜨림으로써 자기 파괴의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용서의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중요한 면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치유’입니다. 용서는 단순히 응징의 포기나 받을 것의 탕감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을 그 죄의 굴레에서 꺼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죄를 인정하는
사람이 용서받으면 그는 자신의 악함을 치유받고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용서란 참으로 거룩한 일이요 신적인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이 품은 의문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어찌 사람이 용서를 통해 악행을 행한
자의 악함까지 치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심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당신을 따라 용서를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세례받은 우리는 세상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너도 거기에 있었느냐

-한상갑-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시몬의 집은 그분을 뵙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또한 예수님께 그를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어서 지붕을 벗기고 그를 들것에 달아서 내려보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한 말씀으로 그를 낫게 하십니다. 중풍 병자와 그를 도와주는 주위 사람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열정과 사랑이 참 아름답게 돋보입니다.
전주 인근에는 능선이 길고 그 고도가 높게 유지되어 산세가 아름다운 ‘모악산’이라는 이름난 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주 시내에는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 일가(동정부부와 가족) 일곱 분이 함께 묻힌 무덤이 자리한 ‘치명자산’이 있습니다. 해발 8백 미터쯤 되는 모악산은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그 절반 높이도 안 되는 치명자산은 순교자들의 삶을 기리는 순례자들 몇이서 조용히 찾을 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자매는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리에 보조기를 해서 무릎이 굽혀지지 않기에 걸음걸이가 많이 뒤뚱거립니다. 그 자매가 지난 사순절에 치명자산을 올랐다고 합니다. 몹시도 가고 싶었는데 신자들 중에 같이 오르자는 사람이 없어서, 신자가 아닌 후배 두 명의 도움을 받아서 산에 올라 미사에 참례했다고 합니다. 제 힘으로는 산을 오를 수 없는 자매와 함께한 사람들이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크고 많은 은총의 양동이를!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중풍병자 치유 얘기입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자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도우미들이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 보내 치유 받게 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묵상할 때마다
이들의 행위가 지성일까, 아니면 극성일까 생각해봅니다.
어찌 보면 치유 받고픈 사람이 많은데 그들을 제치고
자기만 치유 받으려 하는 이기주의적인 극성 같기도 하고,
은총을 받으려면 이 정도의 지성은 드려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작년 포르치운쿨라 축일 행사를 주관하면서
저는 <지성-정화-은혜>의 개념을 가지고 계획을 짜고 진행했습니다.
설명을 하자면,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옛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우리가 지성을 드려야 하고 죄를 씻는 정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지성을 드리는 마음으로
며칠 또는 적어도 몇 시간을 걸어 행사장까지 오게 했고,
밤새도록 기도하며 고백성사를 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좋던 날씨가 하필이면 그날부터 바뀌어
1박 2일 행사 내내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거였습니다.
천 여 명을 모두 수용할 실내 공간이 없기도 했지만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희생과 정성을 있어야 한다는 맘으로
원래 계획대로 강행을 하였습니다.
제가 너무도 감동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 비를 그대로 맞으며
그야말로 비에 밥을 말아 먹고,
강의도 듣고, 고백성사도 보고, 찬양도 한 것입니다.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참석한 모든 분들도 대단히 감동들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비가 오는데도 아무도 피하지 않고 비를 맞는 옆 사람들을 보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감동을 한 것이지요.
아마 혼자 그렇게 하라면 그러 하지 못했을 겁니다.
같이 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감동도 훨씬 컸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다음날 폐막 미사를 할 때는 비도 걷히면서
모두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미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씀이 있지만
지성이 하늘을 감동케 하기 전에 사람을 감동케 한다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는 우리의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은총을 주지 않으려던 마음을 바꿔 은총을 주실 거라는 생각도 있지요.

그러나 은총이란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 때문에 무상으로 주시는 것이니
우리의 지성이 은총을 이끌어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의 지성은 하늘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은총을 이끌어내는 게 아니라
은총을 받기에 합당한 우리의 자세가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의 지성이란 비가 올 때 양동이를 갖다 놓는 행위와 같습니다.
은총이 비처럼 내리는데
어떤 사람은 양동이를 갖다 놓고,
어떤 사람은 사발을 갖다 놓을 수 있지요.
어떤 사람은 양동이도 몇 개나 갖다 놓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 것도 갖다 놓지 않을 수 있지요.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와 도우미들처럼
은총의 양동이를 큰 것으로 준비하고 많이 준비합시다.
하느님의 은총은 한량없어서 그것을 다 채우시고도 남을 겁니다.

 

마음의 벽을 허물게 하는 것

- 황지원 신부-

 

대세를 받고 돌아가신 분의 장례미사를 봉헌하다 보면 유가족 가운데 신자들은 많지 않지만, 주변에 믿음이 좋은 신자 분들이 많음을 알게 됩니다. 언제나 성당 일에 열심인 며느리나, 어려운 집을 방문하고 신앙을 전하는 구역반장과 오랜 시간 외짝교우로 힘겹게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 이 모든 분의 기도가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벽을 허물게 하고 구원으로 이끌어 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비록 돌아가신 분의 삶은 하느님 보시기에 부족할지라도, 이처럼 가족과 이웃의 믿음과 신앙이 돌아가신 고인을 하느님께 이르는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몸을 가눌 수 없는 중풍 병자를 네 사람이 예수님께 인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벽에 가로막혀 그분께 다가설 수 없자,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벗기고 그분께 병자를 달아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의 믿음뿐 아니라 그를 예수님께 인도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총도 성인들의 믿음을 통해서, 또한 우리 가족과 주변의 희생과 믿음을 통해 누리는 선물임을 기억하고 우리도 이웃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희생하는 삶으로 그분께 다가설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의 잘못까지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
-
경규봉 신부-
가나안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왕이 국민을 통치하는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주변의 나라와는 달리 왕이 없는 부족사회였다.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한 분이신 야훼 하느님이셨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그들의 왕이셨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필리스티아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자주 패배하게 되자, 그 까닭이 자신들에게 왕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도 필리스티아(블레셋) 사람들처럼 왕이 다스리는 국가체제를 갖춘다면 왕의 인도 하에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예언자 사무엘은 늙었고, 판관으로 내세운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제 하느님께서 친히 왕으로 계시면서 예언자나 판관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왕에게 의지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하느님을 배척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청한다.

이러한 백성들의 생각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사무엘을 통하여 왕정제도가 지닌 여러 가지 모순점을 백성에게 설명하며, 왕을 내세웠을 때 그들이 당할 여러 가지 고초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신다. 그렇지만 이미 왕을 모시겠다는 그들의 완고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 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 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1사무 8,19-20) 하고 완고한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완고한 고집대로 해주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

우상숭배란 꼭 어떤 신상(神像)이나 고목나무 앞에서 절을 하고, 소원을 비는 것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내 삶에서 하느님을 제외시키고, 하느님 대신 다른 어떤 사람이나, 재물, 권력 등을 그 자리에 두고자 하는 것,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하느님 앞에 서있기보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다른 사람처럼 행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는 사람, 그들이 우상숭배자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우상숭배에 빠져있는지 모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느님을 제외시키고, 하느님의 자리를 스스로가 차지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따르기보다 설사 원수일지라도 그 원수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 그러한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자신이 곧 우상숭배자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바라보시며, 우리의 잘못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의 뜻을 받아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옛말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져주시면서 우리를 받아주신다. “그들의 말대로 왕을 세워 주어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뜻을 받아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 안에 주신 더 큰 마음

- 조정희 수녀-

 

학교 곳곳을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남편이 공사장에서 일하다 떨어져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 아주머니의 두 딸이 아버지의 볼에 손을 부비며 “아빠, 어제 아빠가 우릴 알아봐 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전엔 우리를 몰라보시는 것 같아 슬펐는데 어제저녁엔 우리 식구들이 모두 행복했어요.”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찡해 왔다. 아주머니께서도 “당신이 나으면 인제 업어줄 거야, 더 잘해 줄 거야.” 하며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나는 그 가족이 평소 가난함 속에서도 얼마나 서로 위하며 사랑 표현을 잘하고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오늘 복음에서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는 네 사람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그리고 그 병자에 대한 사랑과 소망이 예수님을 감동하게 하고, 그래서 죄인이지만 사랑받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아닌가? 반면에 율법학자는 믿음이 없었기에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의문을 품지 않았는가?
그는 하느님처럼 넓은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기 내면의 더 큰 자기의 모습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록 몸은 마비되어 있어도 당신을 믿고 찾는 병자에게는 당신의 사랑과 자유와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고, 몸은 건강하지만 용서하는 사랑을 믿지 못하는 율법학자에게는 눈을 뜨고 믿도록 초대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도 작은 자존심에 매여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할 때가 있다. 자존심보다 더 귀중한 사랑의 마음으로 살도록 부르시는 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고 싶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떤 형제님께서 중요한 회의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던 도중 난데없는 괴한의 습격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얻어맞고 칼에 찔렸던지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지요. 간신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집까지 업혀 온 그는 자기 형에게 사정했습니다.

“형, 난 이제 살아날 가망이 없어. 차라리 날 죽게 놔두는 것이 이 엄청난 고통을 덜어주는 거야…….”

그는 절박하게 자신을 안락사 시켜달라고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를 나눈 형으로서는 차마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었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머뭇거리는 형에게 동생은 계속해서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습니다.

마침내 형이 결심을 굳혔습니다. 동생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었어요. 그의 손에 서슬 퍼런 일본도가 쥐어졌고, 그는 온 힘을 칼끝에 모아 힘껏 동생의 목을 향해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안 된다. 얘야!”

바로 그 순간 곁에 있던 그의 어머니가 동생의 몸을 덮었고, 결국 그는 어머니의 애절한 부탁 때문에 아우의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의사들의 정성어린 치료와 어머니의 간호 덕분에 점차 회복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일본 근대화를 앞당긴 명치유신의 주역으로, 일본 외무대신을 지내기도 한 이노우에 가오루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두 가지 모습이 나오지요. 형님의 사랑은 포기하는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 지키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랑을 간직해야 할까요? 분명히 형님도 동생을 사랑했었지요. 그러나 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동생을 안락사 시켰다면 어떠했을까요? 바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 지키는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나옵니다.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은 상태이기에 자신의 친구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갈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낸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중풍이라는 병으로 꼼짝달싹 하지 못하는 친구가 예수님을 통해서 과연 낫게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러한 행동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사랑, 즉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남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일까요? 예수님을 감동시킬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나요?

사랑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세요.

 
 

 고통의 회상이 감사의 삶이다     

-박기호 신부-
 

건강했는데 암이라 진단받고 치료받는 이웃들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내 몸에도 어떤 암이 붙어 자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운동하고 적절한 수면과 휴식을 취하고 스트레스를 피해야 하고 즐겁고 긍정적 태도로 살아야 하고…. 그렇지만 산다는 게 어디 뜻대로 되던가요? 그럭저럭 사는 게지요. 그렇지만 정작 나와 가족에게 닥치게 되면 비로소 생활습관을 후회하면서 생명의 고비 앞에 긴장합니다. 다행스럽게 치료되어 퇴원하게 된다면 이제 용서받은 각성의 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인생의 지평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치유해주시며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용서와 치유는 예수님께서 하셨지만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건강한 삶이란 지나간 고통의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살이를 잊어서는 아니 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헌신으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봉헌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통의 상징인 들것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 손으로 들고 제 발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들것을 들고 간다 함은 이제 인생의 관조가 더욱 성숙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제 상처받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으로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박영대-

 

나는 기적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아마 내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걸 본 적도, 기적에 매달려야 할 만큼 절박했던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에 내가 가장 절실하게 기도했던 건 큰딸 혜진이가 급성후두염에 걸렸을 때다. 그러나 그때도 기적에 기대야 할 만큼 위급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최근 기적을 바란다. 착하디착한 두 여자 때문이다. 한 명은 후배이고 또 한 명은 선배다. 둘 다 암에 걸렸다. 선배는 이민을 떠난 상태라 만날 수도 없다.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거짓말처럼 나아 오래오래 살면서 가끔은 내게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가 내게 그 기적을 정말 간절하게 바라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머뭇거릴 것이다. ‘예, 그럼요. 간절하다마다요. 내 목숨을 바쳐도 좋아요.’ 이렇게 말할 수 없어서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 그만큼 두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정말 미안하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간절함이 있다. 지붕이 아니라 하늘에라도 구멍을 내겠다는 간절함이 있다. 기적이 일어나는 건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그 간절함 때문일 것이다. 그 간절함은 사랑에서 비롯되기에 더없이 아름답고 숭고하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또한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다.
우리 교회 안에서 치유를 대가로 돈을 주고받는 일이 있다고 한다. 놀랍고 마음 아프다. 그 상혼이 질리게 무섭다. 
  

  

 

  용서하는 마음

-이철구신부-

 용서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잘못이 사소한 일이라 해도 용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또 누군가 나에게 큰 상처를 주는 잘못을 했다면 용서란 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상에 누워 있는 병자를 부르시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병자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용서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으로 자리합니다. 우리 역시 이웃에 대한 모든 편견과 교만을 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죄의 멍에를 지우지 말고
그를 용서함으로써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희망을 갖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그 용서는 화해이고
그 화해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유 루시아 수녀 -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중풍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방법에 대해 묵상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훌륭한 과학자·의사들이 많은 환자를 고쳤습니다. 전기를 발명한 뉴턴, 방사선을 발명한 뢴트겐 박사 그리고 노벨 과학상을 받은 과학자들도 많습니다. 많은 과학자와 의사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병자들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환자의 의식을 바꾸어서 온전한 인간으로 만듭니다.
오늘 성경 구절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자기 병을 한탄하면서 앉아 있지 말고 그 들것을 걷어가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에서 들것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너는 네 병을 나와 같이 치유할 수 있다”고 촉구하십니다. 나도 의사지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환자들은 치유의 속도도 다르고,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옛날의 자기(들것)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박광훈신부-

새삼스런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성당 왜 다니시는 거죠?
무엇 때문에 이 추운 날씨에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물론 대답은 불보듯 당연한 것,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각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이유가 참으로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위해, 남편위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또 아니면 나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 등등...
그러나 막상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생각해본 적은 몇 번이 있는지요?
우리네 신앙생활이라는 것, 이론적으로는 저 세상, 저 하느님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외치면서도 실제로보면 이 세상,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기쁨, 
이 세상의 가치들을 위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아마도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nbsp;아닌가 싶습니다. 
나의 병이 낫기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지 예수님이 하느님이라서, 
하느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심정 그것 때문에, 
다시 말해 하느님 때문에 찾는 것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극단적으로 율법학자들처럼 되어버립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병고치는 용한 사람으로만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하니까 율법학자는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며 예수를 신성모독의 범죄인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실 하느님 말고는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요. 

죄라는 것이 하느님하고 등을 돌리고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가 그러한 등돌린 삶을 반성하고 하느님께 되돌아 온다면 용서라는 것이 
하느님께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당연하고 올바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이 잘못한 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 이전에 우리가 바라는 우리의 가치들, 
우리의 판단을 먼저 생각한다면 우리는 늘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처럼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대로 신앙생활이 되지 않고, 
내가 요구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내게 있어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세상에 없다고 푸념섞인 말들을 서슴치 않고 내뱉게 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을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다가오시는데 우리가 그런 하느님을 
나의 기준대로만 바라보려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신앙은 내 것과 하느님 것을 따져보고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나를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나를 온전히 포기하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또한 살아가면서 종종 큰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그 장애물을 통과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계에 부딪혀 한 참을 방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장애물을 빠져 나오기까지 잃은 것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참 많은 것을 얻기도 합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도 마찬가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데는 꼭 큰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장애물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신념을 더 굳게 해주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중풍병자처럼 말입니다. 

그의 첫 번째 장애는 '자신이 겪고 있는 중풍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자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의해서 겨우 예수님께서 계신 문 앞까지 당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발디딜 틈도 없는 많은 사람들에 가려 갈 수가 없었습니다.  
또 장애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지붕을 통해 예수님께로 그를 인도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장애물이 생겨납니다.  
이번에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졌는가 하면서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의 편견을 깨뜨리고는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결국 중풍병자는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게 됩니다. 

잠시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만일 그에게 병이 없었다면 그는 그렇게 힘들게 예수님을 만나려 했을까요?  
결국엔 그에게 장애물이었던 '중풍병'이 예수님을 찾게 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가끔은 나한테 장애물이라고 생각한 것이 
도리어 주님께 더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앞에 장애물이 놓여 있다고 돌아서기보다는 주님께 나의 어려움을 봉헌하고 
더욱 더 주님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나한테 놓여있는 그 장애물이 
버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질수도 있을 것입니다. 
잠시 요즘 내 앞에 놓여진 장애물을 신앙의 눈으로 한 번 바라봅시다.

 

 

과거의 죄는 극복되는 것    

- 이중섭 신부-

과거의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5-11) 하며
용서와 해방을 설파하십니다. 지나간 죄와 잘못에 연연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비와 능력을 믿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과거의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잘못을 지워버리지 않고 용서하십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의 전능과 자비를 드러내시며,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와 해방을 체험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태도입니다. 몇 가지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중대한 실패를 반복하지 마십시오. 둘째,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과 유머감각을 잃지 마십시오. 셋째, 하느님께서 우리의 실패를 용서하고 언젠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넷째, 정신적으로 격려와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실패담을 나누십시오. 다섯째,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이 실패한 후에 하느님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연중 제1주간 금요일

- 이차룡 신부


얼마 전, T.V프로에 의사가 암을 손님처럼 맞이하라는 신선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암이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병(病)이라는 글자와 암(癌)이라는 글자를 비교해 보면 입구 세 개가 산처럼 쌓여있는 것이 암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식습관이 암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과음, 과식, 폭음, 폭식이 그런 병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소식이야말로 건강의 비결입니다. 그리고 암을 불청객으로만 여겨 거부하고 화를 내고 절망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친절로서 손님처럼 대할 때 언젠가는 물러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많이 웃는 것이 암 예방과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웃을 떼도 배가 땡길만큼 웃는 것이 몸에 좋다고 하는데 100미터 달리기보다 더 큰 효과를가져 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에너지가 팍팍 생성된다는 말입니다. 많이 웃습시다. 생활리듬을 잃지 말고, 좋은 생각과 좋은 공기를 마시며, 적당한 운동을 매일 하며 소식을 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환자에게 낫다는 믿음과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기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병자의 믿음, 다시 말해 말씀의 능력을 믿은 중풍병자의 믿음과 치유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의 합작품이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은혜를 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만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만 찾아가면 중풍 걸린 친구의 병은 절로 고칠 줄 알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포기하고 다른 날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친구에 대한 사랑이 적으면 일은 간단합니다. 힘들지만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할 만큼 다 했다고 위로하면서 ... 그러나 친구를 고쳐주고픈 마음이 크기에 그렇게 간단하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뵙기만 하면 고칠 수 있는데 어떻게든 궁리를 해야 했는데 결국 네 친구는 한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 보내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친구에 대한 사랑으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바라보셨고, 그 네 친구들의 믿음을 기특하게 여기시어 치유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네 사람은 누구입니까? 병들고 어려움에 처한 우리 이웃을 예수님께 데려갈 네 사람의 역할을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둘째, 오늘 복음의 핵심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며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심으로써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최고의 행적은 죄의 용서요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이르신 말씀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라는 말마디의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병든 세상에 병든 인간을 위해 죄인을 위해 오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의사에게는 필요하다며 나는 의인을 위해 오지 않고 죄인을 위해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의 치유를 넘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가 중풍을 앓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죄였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고정관념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로 말미암아 중풍을 앓고 들것에 누워 지내는 병자들이 많습니다. 

   죄는 육신의 마비를 가져옵니다. 스트레스, 과로와 불안과 두려움, 용서하지 못한 마음, 원한에 쌓여 살아갈 때 어느 날인가 우리는 쓰러지게 됩니다. 용서하라, 그러면 용서받으리라. 용서받은 사람은 알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도 알 것입니다.  늘 반복되는 잘못을 악습이라고 합니다. 고치려고 노력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악습이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 단골메뉴에 들어가는 그것을 악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고칠 수 있는 비법은 고해성사를 끊임없이 보는 것뿐입니다. 수없이 많이 고해성사를 받을 때 언젠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한 염증, 혐오감에 떨어지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주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 축복의 말씀인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해야 하고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네 사람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입니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임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요 직무유기를 하는 것이며, 그것은 복음적인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여기 주님 앞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그 믿음 덕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저의 믿음을 보시고 들어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바로 이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 주님의 용서는 치유로 이어집니다'

 - 홍성만신부-

 

 네 사람이 어떤 중풍 병자를 들고 옵니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이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를 들것에 눕힌 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에 율법 학자들이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군. 하느님 한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중얼거립니다.

 

 그것을 알아채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원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중풍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별떡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들고 나갑니다.

 

 벌떡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나가는 치유받은 이 사람,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네 사람에 의해 들려 왔던 준풍 병자였습니다. 이 환자에게 투여된 약은 오직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중풍 병자가 치유된 근원적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입니다. 죄의 용서는 곧바로 건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용서는 건강으로 이어집니다.
죄의 용서는 위로와 평화로 이어집니다.
이와 반대?죄는 우리를 절름발이로 만듭니다.
외냐하면 죄에는 사물을 올바로 보지못하게 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별하고 판단하는 의식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한는 것' 그 누구도 아닌 주님만의 고유한 권한입니다.

 믿는 우리들, 주님의 용서에 자주 '나'의 마음을 보여 드립시다. 잦은 고해성사로 영혼과 육체에 건강을 회복하여 주어진 인생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오늘도 또 내일도 말입니다.

 
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

 -박상대신부-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 외적인 깨끗함뿐 아니라 내적인 깨끗함을 베풀어주신 후 며칠이 지나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오셨다. 가파르나움의 집이라 함은 시몬 베드로의 집을 말한다.(마르 1,29) 아마도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의 복음선포를 위해 시몬의 집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께서 시몬의 집에 다시 오셨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고,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 앞까지 가득 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마침 중풍병자 하나를 네 사람이 들고 왔으나 들어갈 수가 없음을 알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벗겨내고 구멍을 내어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병자를 내려보냈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욱더 기막힌 것은 그렇게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대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집약하여 보도하는 책으로 착각하면 큰일이다. 기적은 분명 놀라운 일이고 늘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는 기적이 대수가 아니다. 마귀 들린 자, 나병환자, 오늘의 중풍병자 등 어떤 모양의 물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은 예수께 있어서 그리 큰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일들을 도구로 더 큰 일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믿음과 용서이다. 기적을 베푸는 자는 예수님이시나 그 기적을 유발시키는 힘은 기적을 베푸는 자에 대한 믿음이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지붕까지 벗기면서 예수께 내려보낸 네 사람은 적어도 믿음에 있어서는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수 있고, 또 고쳐주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왔으며, 들것에 실려 있는 병자도 같은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뜻밖에도 ’죄의 용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죄(罪) 때문에 병(病)이 온다는 생각은 이미 구약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사실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생각이다. 오늘날 누가 아프거나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고해소를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질병의 원인을 도덕적인 잘못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의 사람들은 달랐다. 굳이 죄 때문에 병이 드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구약의 율법이 온갖 악성 피부병을 ’부정(不淨)’하게 본 것은 사실이다.(레위 13-14장) 레위기가 깨끗하지 못한 것을 죄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정(不淨)함을 죄의 맥락에서 보았던 것이다. 욥기를 보아도 그렇다. 욥이 악마의 시험으로 죽을 피부병에 걸려서 갖은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지 않는가?(욥 9,2.12.20) 예수께서도 38년이나 앓아 누워있었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는 "자, 지금은 네 병이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더욱 흉한 일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른다"(요한 5,14)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죄와 병은 결과론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관념론적으로 한데 묶여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먼저 ’죄의 사함’을 베푸신 것이다. 예수께는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본 율법학자들의 머릿속에 예수의 발언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땅위에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바로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병자의 행동에 의해 증명된다.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병자의 행동은 병이 다 나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10절)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율법학자들은 예수께 이러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한편으로는 의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데는 관심이 없고, 중풍이 사라지고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기적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우리도 속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고백성사를 배령하기보다 불편한 몸이 좀 나아지기를 바라거나 어려운 경제적 형편이 좀 나아지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는가? 


 

  중풍병자(마르2,1-12)

 -유 광수신부-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 때에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그분께 데리고 왔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부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 둘째는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셋째는 네 사람에 의해 예수님께 온 중풍병자, 넷째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네 사람이다. 다섯째는 예수님을 말씀을 듣기보다는 듣고 판단하고 있는 율법학자의 모습이다. 나는 이 다섯 부류의 모습에서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내가 이 다섯 부류 중에 어느 한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중풍병자면 중풍병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복음을 전하고 있으면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네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늘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고 율법학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이나 잡고 판단하고 있으면 늘 남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어떤 사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가? 그런 일을 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사람인가?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복음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모여드는가?

 

 만일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중풍병자일지도 모른다. 또 당신은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사람 중에 한 사람인가? 예수님 주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당신은 많은 은혜를 받고 중풍병자가 중풍병에서 치유되었듯이 당신이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받고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예수님 주위에 모여 있었고 매 주일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쁨이 없고 받은 은혜도 없다면 당신의 신앙 생활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다. 즉 복음을 듣고 복음에 의한 복음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병이나 치유받으려는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중풍병자의 모습일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고 성당에 다니고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더라도 본인 자신이 아무런 느낌도 없고 기쁨도 없고 받은 은혜도 없이 무감각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듣고 있다면 그것이 중풍병자 아니고 무엇인가? 중풍병자의 특징은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누워있으면 있는 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죽은 이의 모습이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의 모습이요, 죽으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시체의 모습이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모습이 당신의 모습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이요,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고 봉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중풍병자를 보시고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하는 일은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요, 사람을 살리는 봉사이다. 나의 믿음은 나만을 위한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나도 구원받고 다른 사람들도 살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살려줄 수 있고 고쳐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를 살리고 다른 이를 살리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살릴 수 있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중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하고 희생을 치루워야 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보라. 오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그들이 중풍병자를 설득해서 들것에 들고 예수님께 데려 오는 것도 힘든 일이고 또 예수님께 데려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뚫는 일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벗기고 구명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 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 이 네 사람이 겪어야했던 어려움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었으며 힘든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갖고 노력하였고 인내하였으며 희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드디어 중풍병자가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들이 사도이다. 하느님의 사람이요, 신앙인의 삶이고 자세이다. 

 

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는 하였지만 그 다음은 중풍병자에게 달렸다. 항상 결정적인 치유는 본인 자신에게 달려있다. 다른 이들은 도와줄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 목마른 이를 우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대신 마셔 줄 수가 없듯이 네 사람의 역할과 중풍병자의 몫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것까지는 네 사람이 할 수 있었지만 중풍병자가 치유받고 못받는 것은 전적으로 중풍병자에게 달려 있다.  만일 중풍병자가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고 하더라도 그가 원치 않았으면 강제로 데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하셨을 때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들것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랫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중풍병자가 치유받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고치지 못했는데 낮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어떤 특별한 진찰도 하지 않고 다만 보시고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한 마디 말씀만을 듣고 일어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믿음이다. 또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결국 중풍병자가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 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병자의 믿음과 치유의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의 합작품이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은혜를 받은 사람은 믿음을 복음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만이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쉽게 어떤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고정관념과 얕은 지식으로 판단만 하는 율법학자들은 아무 은혜를 받지 못했다.

 

그럼 중풍병자가 중풍병을 앓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의 죄였다. 죄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고정관념으로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로 말미암아 중풍병을 앓고 들것에 누워지내는 병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해야하고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을 해야한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이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복음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사도라고 한다.
사도는 자기 영혼 안에 지니고 있는 하느님을 자기 주위에 발산하는 사람이다.
사도는 보화를 축적하고, 그 축적한 보화를 인류에게 전해주는 성인이다.
사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게 대한 사랑으로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절제할 수도 차단시킬 수도 없는 사람이다.
사도는 갈증을 해소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로 달려가 넘치도록 채워주는 선택된 그릇이다.
사도는 자신 안에서 최고도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성전이다.
한 저술가의 말을 빌리자면, 사도는 자신의 몸 전체에서-공사를 막론하고 자기의 말, 일, 기도, 몸짓, 태도를 통해서- 그의 전존재로부터 하느님을 발산시키는 사람이다.
하느님에 의거해서 살라! 그리고 하느님을 주라!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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