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9일 연중 제2주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34)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말씀의 초대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이 어디에 희망을 두는지를 노래한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셨고 힘이 되어 주셨음을 깨달은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인사하며 그들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라고 일컫는다(제2독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증언한다. 또한 그가 그분을 알아본 것은 세례 때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리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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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겨울날은 축제 없이는 지내기가 더 어렵습니다. 추운 날씨에 겪는 육신의 고통이 힘들 뿐 아니라 외로움과 스산함이 가슴속으로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축제의 풍성한 분위기와 작은 선물을 주고받는 따뜻한 관계들이 이 차가운 계절의 움츠러든 마음을 달래 주니 그나마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탄의 황홀한 설렘도, 연말연시의 떠들썩함도 아련하고 설날은 아직 먼 요즈음에는, 한겨울의 거리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 자주 듭니다.
이럴 때에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라는 연가곡이 잘 어울리겠지요. 독일의 유명한 성악가가 부른 이 곡에 대한 얘기를 몇 해 전 저희 교구의 주교님에게서 들은 뒤로 이 곡이 자주 떠오릅니다. 본디의 곡명이 ‘겨울 여행’인 이 곡은 실연한 청년의 방랑을 표현한 한 작가의 연작시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는, 마을 어귀에 맨발로 서서 곱은 손으로 손풍금을 연주하는 늙은 악사 앞의 접시는 텅 비어 있는 가운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겨울의 한산한 풍경보다 더 외롭고 가슴 아픈 사람들의 모습이 선히 그려집니다.
이렇게 황량한 겨울의 스산한 마음을 주일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의 성령과 공동체의 온기로 채워 봅니다. 추위에 곱은 손과 외로움에 얼어붙은 마음들이 얼마나 많은 절망과 우울함으로 저 모퉁이에 서 있을지 헤아려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앞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이 말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다가 죽임을 당한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부활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하느님이 그분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도록 버려두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앙인들은 구약성서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이사야서에는 “야훼의 종”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스스로는 죄가 없으면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벌을 받는 인물에 대한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기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53,7).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해방절 관행을 상기시킵니다. 유대인들은 해방절에 어린 양(탈출 12장 참조)을 잡아 성전 구내에서 피를 흘리고, 집에 가져와 가족들이 그것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야훼의 종’에 대한 이사야서의 말씀과 성전에서 거행되는 ‘어린양’의 희생 의례를 참고하여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진 ‘야훼의 종’과 같고, 우리를 위해 해방절에 성전에서 피를 흘리는 ‘어린 양’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 죄에 대한 대가(代價)를 치렀다는 믿음이 발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목숨을 내어준다.”(마르 10, 45)는 말씀도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오늘도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대신한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해석입니다.
과거 사회에서 사람들은 높은 사람 덕분으로 산다고 쉽게 믿었습니다. 백성은 임금님의 성은(聖恩)을 입고 삽니다. 고을의 주민은 원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원님이 사람 하나 죽이려 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자기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 말에 쉽게 수긍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은혜로운 일을 한 예수님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남의 몸값을 대신 치러주고,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일은 그 시대의 관행입니다. 노예나 전쟁 포로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상황은 다릅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자신이 결정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나의 운명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남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는 관행도 오늘은 없습니다. 몇 년 전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인질로 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한국선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사회의 관행이 아니라, 해적이 하는 만행(蠻行)이고 범행이었습니다. 그런 범행을 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소탕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은 인간 각자가 자기의 삶을 자유롭게 살 권리를 가졌다고 믿는 세상입니다. 지위와 재물이 있다고 남의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인권(人權)은 이제 우리 사회의 기초질서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대인에게 2000년 전 예수라는 한 인물이 십자가에 죽어서 우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말하면, 현대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서가 예수님을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해방절 관행을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은혜로운 일을 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율법준수와 성전 제물봉헌을 강요하던 유대교 당국에 맞서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버려진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 들렸다고 외면당한 이들을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유대교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그것 때문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알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은혜로운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예고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사람을 물에 잠기게 하는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성령 안에 잠기게 하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 안에 일어난 모든 변화를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창조도 성령이 하신 일이었고, 예언자들의 입을 빌려 말하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교회의 설립도 성서는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요약합니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그분은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니, 이는 내 것을 받아서 여러분에게 알려 주시겠기 때문입니다.”(16,13-14).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또 그분이 하신 일을 실천하며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그것을 돋보이게, 곧 영광스럽게 하시는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실의와 절망에 빠진 병든 이들과 장애인들을 고쳐 주면서, 예수님은 그 불행들이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웃을 고치고 돕고 살리는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계십니다. 인류는 심판하고 벌주는 하느님을 즐겨 상상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우리가 상상하는, 두려운 하느님을 버리고, 베풀고 용서하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하신 일, 곧 고치고 돕고 살리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성령이 살아계시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세례라고 부릅니다. ◆
예수님의 눈…
-신재욱신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것을 보고 사람
들에게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예수님 위에 머무르심을 보았다
말하며 자신이 직접 본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으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보내신 분께서 그것을 볼 것이라 일
러주셨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마음 안에 돈에 대한 욕
심으로 가득 찬 사람은 모든 것을 경제적가치로 판단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경제력이 뛰어난지, 어떠한 물건이 얼마만큼의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지에만 관심을
둡니다. 권력에 눈이 먼 사람은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아첨하며 힘
없는 사람을 무시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
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며 우리는 예수님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
종 예수님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잊고 자신
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세상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려면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성령의 활동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내 곁에,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안 계신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먼저 찾고 예수님
의 자리를 마련해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은 후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복음 전도를 위해서 예수님은 동역자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몇 명의 제자를 부르신 후,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기적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복음을 위해 온몸을 던진 예수님의 진솔한 삶을 요약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복음서 작가들 중에서도 유독 '하늘나라' 라는 표현을 좋아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유다교의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출애 20,7)는 십계명을 생각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그에 따라 유다인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야훼)에 모음을 붙여놓지 않았는데 자음만 가지고는 발음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 땅, 바다의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출애 20,3)라는 계명도 있는데, 그 계명에 따라 하느님을 생각나게 하는 인간의 조각상이나 인물화마저 제조를 막았습니다. 모두 하느님의 이름과 모습을 함부로 부르거나 만들 수 없도록 원천 봉쇄한 조치입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은 '하느님 나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 하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하느님 나라'를 향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으로 힘차게 파고 들어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느님의 나라는 오지 않았는데, 하느님의 궁극적인 통치는 역사의 종말에나 가야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느님 나라의 시간성을 두고 흐르는 긴장을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합니다.
제2독서인 1고린 1,10-13.17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세례를 베풀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러 보냈다고 말합니다. 고린토에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빌미삼아 파가 갈라진 사태를 보고 자신의 입장을 강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용어는 공유하지만 내용은 차이가 나는데, 예수님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복음의 내용이었고, 바오로에게는 '예수님' 자체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당연히 후자의 것입니다. 이사야는 원수를 쳐부수는 하느님의 능력을 언제나 감동 넘치는 언어로 표현합니다(이사 8,23-9,3). 특히 하느님께서 이방인에게도 빛이 되신다는 언급은 복음(하느님 나라)이 가지는 보편적인 성격의 근거가 되는 구절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줍니다. 지하철 전도사들이 부르짖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등장하는 천당(天堂)이 바로 '하느님 나라'와 같은 개념이고, 노숙자에게 전해지는 따뜻한 죽 한 그릇으로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다는 강론도 들을 수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 나라'란 무엇일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두고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신 것일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두고두고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어떤 난관에도 사라지지 않고 2천년 동안 먼길을 건너와 낯선 땅 한국에도 전해졌고,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위력은 무엇보다도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
-장승용 신부-
지난 주 주님 세례 축일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를 묵상했던 성탄시기를 보내고 연중 시기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교리를 가르칠 때도 쉽게 설명을 하기 위해 연중 시기를 평범한 날들이라고 전제를 두고 시작을 했는데, 교회는 이 시기 동안 우리의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동안 말씀하시며, 행하신 모범을 순차적으로 기억하며 실천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때 그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물로 삼았던 과월절 양이기도 하며,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참았으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깍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고 하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즘의 세상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누가 자신의 잘못을 대신하여 벌을 받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아마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혹시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에 합당한 댓가를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사의 논리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신의 권리도 못 찾는 '바보' 취급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사고방식만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현상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큰 나무를 지탱하고, 조율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하기에 세상은 희망적입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과 결단이 있기에 아름다운 세상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은 합리적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낮은 자리'입니다. 그곳은 '굴욕의 자리'입니다. 그곳은 '바보같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저희를 그곳에 초대하십니다.
'초'가 타야하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태워짐을 거부한다면 더 이상 '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이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을 거부한다면 더 이상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뜻에 따라 모든이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도록 길이 되어주라는 소명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소명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속죄양'이 되어줄 때 그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 빛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 빛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김길상 신부
우리는 매일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영성체 전과 사제가 성체를 들어 높이고 외치는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린양은 일년 된 흠없는 수컷양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입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일년 된 흠없는 어린양을 바쳤습니다. 또한 그 옛날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때 그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희생제물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대사제 즈가리야의 아들로서 매일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을 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인류를 세상의 죄와 죽음에서 구해 주시기 위하여 장차 희생될 제물인 어린양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기를 ‘세상의 죄를 없애실 하느님의 어린양’ 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표현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사 53, 7)이라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당할 수난의 모습을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모습을 예수님 안에서 보고 그분이 받으신 사명과 그분이 장차 사실 삶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말이 ‘세상의 죄를 없애실 하느님의 어린양’인 것입니다.
세상의 죄는 요한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문제입니다. 세상의 죄는 참으로 많고 다양합니다. 이 세상의 죄는 전쟁과 살인, 폭력과 불의, 미움과 불신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만연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죄이며, 또 어느 누구 한 사람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의 행위보다는 그 뒤에 숨어서 그 죄를 낳게 하는 신비스런 힘(성서신학사전 죄의 편)에 보다 더 관심을 갖습니다. 그 힘은 인간의 마음 안에 깊이 자리잡고 계속 죄를 낳게하는 마치 죄의 씨앗과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 힘은 하느님을 거스르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적대시 하며 폭행을 가하는 세력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와같이 세상의 죄의 모습은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이 인간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세력과 맞서실 분이시기에 세상의 죄를 없애실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이기실 수 있으신 것은 성령으로 가득차신 분이시며 아버지와 하나이시고 어두움이 전혀 없으신 밝은 빛이시며 거짓이 없으신 진리이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세례를 우리에게 베푸시어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을 건네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씨’(1요한3, 9)를 뿌리십니다. 평화와 사랑의 씨앗, 정의와 용서의 씨앗, 친절과 온유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씨앗이 자라나 그 열매를 풍성히 거둘 때 우리 안의 죄악의 씨앗은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도록 함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애는데 동참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세상의 죄를 없애는 어린양’ 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이용화 신부
교회 전례로 우리는 연중시기를 맞이한다. 연중이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 삶이 평범한 일상의 반복에 있음을 일깨어 준다. 이 반복적인 삶에서 교회 전례는 하느님 숨결과 부르심을 받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주님은 삶에 지친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깨우쳐주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어린양’으로 오시어 삶에 대한 희망을 선사하신 분이시다. 어떤 외적인 허황한 꿈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그분은 삶을 속이는 허황한 꿈으로 오신 메시아가 아닌 모든 이들의 가슴에 희망을 선사하는 분으로 오신다. 그러한 의미에서 연중시기에 사제들이 입는 녹색 제의가 주는 의미는 삶 안에서의 강한 희망을 내포한다.
오늘 복음은 주님 세례 축일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요한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오시는 것을 보시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고 말씀하신다. ‘양’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속죄의 제물과 평화를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죄를 없애주는 상징으로,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결단을 내리게 만드는 원동자이다. 이어서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때 성령이 예수님 머리 위에 머무는 것을 보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다. 두 세례 장면에서 마태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강조하고 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야훼의 종’에 대해서 말한다. 이 ‘야훼의 종’은 흩어진 이들을 모으고 해방시킬 뿐 아니라, 만국의 빛이 되어 구원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야훼의 종’은 요한이 제시한 ‘하느님의 어린양’과 동일하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에 있는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은총과 평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울로는 세례를 받은 고린토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들이기에 그에 알맞은 행동과 거룩한 백성으로서 선물로 받은 은총과 평화를 잃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다.
성서는 ‘양’이라는 표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메시아인 주님을 설명하곤 한다. ‘양’이란 동물은 외적인 모습이 평화를 상징하는 색깔인 흰색의 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털이 깎일 때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축제 때는 자신의 몸을 바쳐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성격 또한 순종적으로 주인을 잘 따른다. 양은 생긴 것처럼 행동 또한 이율배반적이지 않다. 그러기에 아버지께 순종하고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바친 예수님과 어린양은 잘 어울린다. 때로는 그분의 삶이 바보 같은 삶으로 비추어 지지만, 그의 삶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매료당하여 그를 따르고자 한다. 오늘 조금 희생하고 양보하고 웃어 줄 때 예수님을 닮아 가지 않을까?
세례자 요한의 증언
-윤영균 신부-
오늘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엄청난 사실을 증언하고 선포한다. 그 증언에 대하여 잠깐 묵상하자.
첫째, 요한은 예수님을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증언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성부께 바치는 제사의 제물이 곧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세상의 죄를 없애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화해의 제물, 죄의 대가의 제물 노릇을 하셔서 곧 내 죄의 대가로, 예수님 자신이 내 대신 죽어주는, 그래서 내 죄를 없애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천지 창조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결국 예수님은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시라고 요한은 증언하고 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실 분"이라고 요한은 증언한다. 요한의 세례는 단지 회개의 의미만 갖는 세례이지 결코 모든 죄까지 없애는 세례는 될 수 없고, 더욱이 하느님의 아들 딸로 변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베푸는 예수님의 세례는 인간의 모든 죄를 없애주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서 천당까지 가게 하는, 엄청난 기적을 낳게 하는 세례임을 요한은 선포한다. 여기서 요한은 성령이 계심을 증언해서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가 계시고, 그 중 예수님이 성자로서 오심을 만인에게 증언하고 선포한다. 이 당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존재 선언은 천지 개벽이래 새로운 하느님 본질의 선언이었다.
결론을 맺어보면 세례자 요한은 그 당시 만인이 추앙하는 대 선지자였고, 심지어는 구세주 예수님으로 오해받을 정도였던 시점에서 예수님이 곧 구세주이시며, 삼위일체 중 성령과 함께 세례를 베푸시는 성자, 하느님임을 명백하게 증언하고 선포한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고 선포해야 하겠다. 식당에서 성호 긋고 식사하기, 술집에서 성호 긋고 술 마시기, 예비자 안내, 냉담자 회두 권면, 불우 이웃 돕기,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아침·저녁 기도하기, 양심 바르게 살기 등등을 통해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직·간접적으로 증언하자.
하느님의 어린양
-김희남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 ‘어린양’이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의미가 있었습니다. 먼저 속죄의 제사를 위해서 바쳐지는 희생양으로서의 의미와 하느님께 온전히 믿음을 두는 충실한 종의 의미, 그리고 삶을 위한 일상의 음식으로써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여러 의미가 복합적으로 들어있다고 봅니다.
우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는 희생제물로서 오십니다. 우리 모든 인간의 죄를 없애시고자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인간에게 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인간의 죄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이 죄 속에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깨달았을 때,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청중들에게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에서도, 어떠한 사람들로부터도 얻을 수 없는 구원을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이룰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언제나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겸손한 분으로서 오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마음에 온전히 드는 분이십니다.
또 그분은 우리에게 음식으로써 오십니다. 모든 이를 살찌우기 위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키워주십니다. 우리가 음식없이는 살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없다면 생명력을 잃어갈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외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십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미사성제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 형제들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구원자이시며 해방자이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시는 주님을 얼마나 알아뵈옵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오로지 현세적인 것에 모든 힘을 쏟고, 희생과 보속, 고통의 의미를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세상적 가치의 성취와 영화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십시다. 또 세상 사람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의 참된 구원의 ‘어린양’이심을 세례자 요한과 같이 힘있게 증거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우리 모두 하나 하나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의 구원의 신비에로 나아갈 때, 이 세상은 한 걸음씩 구원의 목표에로 다가설 것이며 종말에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1고린 15,28) 그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습니다
- 박용식 신부-
제가 지난해에 넘어져 다쳐서 엄지손가락을 붕대로 싸매고 다녔더니 한 신자가 "아니, 신부님도 다치세요? 우리 같은 죄인이야 넘어지면 다치는 게 당연하지만 신부님은 하느님이 보호해 주시고 막아주시는 줄 알았는데요"하고 뼈가 있는 농담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당신 뜻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느님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큰 죄는 무지(無知), 즉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요한 세례자가 두 번이나 "나도 저 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예수님에 대해서 몰랐다고 고백하며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수녀님들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면 딸이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던 부모들이 많았답니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몰랐기 때문이겠죠. 그 중에는 외동딸이 수녀원에 간 후 매일 아침 찬 물을 떠놓고 하루 속히 수녀원에서 나오도록 신령님께 빌었다는 어머니도 있었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을 때는 딸이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을 그렇게 반대하더니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고 나서는 수녀원에서 살고 있는 딸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의 기도 덕택으로 딸 수녀들이 잘 살아가고 있답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삶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군요.
바오로 사도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라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지만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로마 시민임을 자랑으로 여겼고 부귀영화를 좇아 살았지만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그 좋아하던 부귀영화를 쓰레기로 본다고 했습니다.
저에게도 좋아하던 것이 쓰레기처럼 하찮아 보인 경험이 있습니다. 민물낚시에서 붕어낚시가 으뜸이라면 바다낚시에서는 단연 돔(도미)을 잡는 재미가 첫째일 것입니다. 제가 낚시로 그 돔을 낚아보기 전에는 고등어 낚는 재미를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돔 낚는 재미를 느끼고 부터는 고등어 잡는 재미는 아주 형편없어졌습니다.
특히 돔 중에서도 감성돔을 잡는 손맛을 알고부터는 고등어 잡는 재미는 쓰레기처럼 하찮게 보였습니다. 전에는 팔뚝만한 고등어를 잡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는데 감성돔 잡는 재미를 알고 난 후에는 고등어는 물고기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참으로 깊은 진리를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을 알기 전에는 세속과 물질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주님을 알고부터는 물질이 주는 기쁨이 쓰레기에 불과한 것을 깨달았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알고, 신앙의 참 맛을 안다면 그 좋아보이던 돈도, 부귀권세도 하나같이 쓰레기로 여길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늦게야 님을 알았다.", "님(하느님)이 자신 안에 계시거늘 다른 곳에서 님을 찾았다"고 「고백록」에서 고백한 것처럼 주님 안에 참 행복이 있는데 우리는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순교자들도 처음에는 주님을 몰랐지만 주님을 알고 난 후에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주님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식이나 생명보다도 주님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마침내 목숨까지 바쳐 순교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는데 후에 알고 보니 하느님이요 주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하느님을 알게 됐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할 때는 세상의 쾌락과 물질을 그토록 좋아했지만 주님을 알고부터 달라졌습니다. 주님을 모를 때는 이 세상에서 물질이나 건강이 최고인 줄 알았고, 부귀권세가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축복과 신앙의 혜택을 알고부터는 이 세상을 달리 보게 됐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물질을 쓰레기로 보는 경지에까지는 아직 다다르지 못했지만 재물에 끌려 다니지는 않게 됐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인생을 살찌게 하거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며, 마침내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됐습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 당신이 누구신지를 모르던 저희를 부르시어 당신을 알게 하여주시고 영원한 생명에까지 이끌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죄”
-고찬근신부-
가끔 고백소 안에 들어오신 할머니가 이렇게 고백하시는 적이 있습니다. “에구, 신부님, 사는 게 죄지유.” 이러시면 참 난감합니다. “그럼, 살지 마셔유.” 그럴 수도없고…. 그런데 오늘은 할머니의 그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보게 됩니다. 살면서 나도 모르게 짓는 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자판기 주위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프리카에 굶어 죽는 어린이들이 많다는 얘기를 하며 불쌍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모릅니다. 근래 남미 아마존강 유역의 나무들이 너무 많이 벌목되어 그곳에 구름이 생성되지 않아 아프리카에 비가 안 오고 사막화가 진행되어 농토가 줄어든 아프리카 사람들이 굶주리게 된다는 것인데, 지금 우리가 한번 쓰고 버리는 자판기 종이컵의 원료가 바로 그 나무라는 것을. 우리는 아침 출근 꽉막힌 길, 승용차 속에서 방글라데시에 홍수가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뉴스를 접하곤 ‘왜 그 가난한 나라는 늘 불행한 일만 닥치는 거지?’ 하며 동정의 마음을 갖습니다. 바로 그 시간 내 차에서 나오는 배기가스가 지구 온난화를 촉진하여 빙산이 녹고 해수면이 올라가 저지대인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들에 홍수가 발생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또한 음식 쓰레기를 그렇게 많이 버리면서 식수 오염을 걱정하고, 살빼기 위해 러닝머신을 뛰면서 북한의 탈북난민들이 시장바닥 음식쓰레기를 주워 먹는 텔레비전 장면을 보기도 합니다.
내가 써버린 종이컵이, 내 승용차가 내뿜는 배기가스가, 내가 버리는 음식쓰레기가, 나의 과식이 세상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부릅니다. 방금 말씀드린 우리의 무감각, 무관심, 편의주의가 만들어 내는, 나도 모르는 죄가 바로 ‘세상의 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죄도 아니고 너의 죄도 아니라고 생각되고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지만 분명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그런 죄 말입니다. 그 죄를 없애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이기심과 무관심이 자라고 퍼져 나가면 엄청난 파괴의 힘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의 죄의 파도를 막기 위해 죄 없으신 몸으로 홀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희생의 길이 세상의 죄를 없애는 길임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십자가 희생의 길이 돌 같은 이기심과 무관심으로부터 살 같은 양심을 일깨우는 길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을 갈 차례입니다. 이 시대는 가히 빈익빈 부익부의 시대이고 기회 불균등의 시대라 말할 수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또다시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십자가의 길을 가셨지만,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십자가의 길을 가야합니다. 이 시대 우리의 죄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가지고, 더 많이 먹은 죄가 아닐까요?
자기 영혼 구하는 삶 살아야
-최인각 신부-
내 영혼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
모든 분이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맞이하며 기쁜 성탄 시기를 보내셨으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기쁘고 감사한 성탄 시기를 보내도록 기도했으니 말입니다.
이제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행하신 바를 묵상하는 연중 시기입니다. 이 시기 동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가르치시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신 구세주로서의 참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례자 요한을 통해 드러내는 장면이 전개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시러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이며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복음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돈 많이 버는 부자로 만드시려는 것도 아니요, 머리를 좋게 해 공부를 잘하여 일류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을 갖게 하기 위함도 아니며, 멋진 배우자를 만나 결혼해 자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또한, 우리를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게 하려고 오신 것도 아니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의 복을 내려주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세상의 복을 채워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든 가르치셨고, 병약한 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며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당신 말씀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 선물로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지난 연말에 한 해 동안 있었던 일을 적어보며 한 해를 정리하였습니다. 맡은 직책들, 행한 일들, 많은 사람과의 만남, 많은 사건 등. 그중에서 내 영혼에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저 없이 ‘고해성사’라고 쓸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크게 생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해를 잘 마무리하게 해 주심에 감사하는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계속해서 ‘내 영혼을 위해 가장 잘한 일’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새해를 계획하면서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나중에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내놓을 것을 생각하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깨끗한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많은 일을 맡고 있고, 그것을 잘 행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내 영혼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부수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주 복음을 묵상하며, 천주교 요리문답 제1번이 기억났습니다. 문: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답: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제가 왜 지난 한 해 동안 내 영혼에 가장 잘한 일을 고해성사라고 쓸 수 있었을까요? 성직자로서 세상에 그리 몹쓸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하느님께 ‘…같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고,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해 주시며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행한 것이 많건만, 다른 어떤 것보다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은 일이 기억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나의 내면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죄 없이 당당히 잘 사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의 내면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내밀한 원의를 아시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혼 내면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외치는 ‘순수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로 살면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며 은총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며,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례자 요한이 외친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은 우리 영혼에게 가장 필요한 분이시기에 오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현재 자신의 영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