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2014. 1. 21. 오후 1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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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
(마르2,18-22) 


As long as they have the bridegroom

with them they cannot fast.
No one sews a piece of unshrunken cloth

on an old cloak.
If he does, its fullness pulls away,
the new from the old, and the tear gets worse.

말씀의 초대

 사무엘은 전리품에 욕심을 낸 사울의 불순종에 대해 책망한다. 사울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지만 사무엘은 주님의 말씀을 배척한 사울의 행동 때문에 주님께서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리시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율법 학자들에게 당신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차원을 일러 주신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다가온 하느님 나라는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몇 년 전에 한 가톨릭 성서학자가 쓴 『예수님은 세상에 어떤 새로움을 가져오셨는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제목의 질문이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언제부터인지 제가 무의식중에 종종 교회를 번잡함을 피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방공호’, 또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온건한 중재자인 것처럼 여기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깊이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셨고, 이로써 이 세상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 이를 확신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의 신앙에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생동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개신교 목사로 나치 독일에 반대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현대 가톨릭 신학에도 많은 영감을 준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형태를 세상에 선사하시려 오셨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가 여기서 ‘종교’라는 말로써 비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관습과 선입관에 매달리며 복음의 가치관에 따라 삶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거부하면서도 스스로는 어엿한 종교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반면 ‘새로운 삶의 형태’는 바로 복음에 마음이 움직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가치들을 선택하며 사는 모습을 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새 포도주가 헌 부대를 터뜨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복음과 관습은 때로는 날카롭게 충돌할 수 있고, 이는 각 개인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당장은 피하고 싶은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새로운 삶의 길을 두려움 없이 신뢰하며 걸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참된 자세입니다.

새 포도주 같은 힘

- 황지원 신부-

 

새벽에 일어나 미사 복사 봉사를 하기 위해 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예쁘기 그지없습니다. 제의방에서 미사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을 때면 예전과 다르게 많은 친구가 꿈이 없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조금 현실성이 없더라도 이루고 싶은 꿈 하나쯤은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던 예전에 비해, 요즘 친구들은 너무 현실에만 갇혀 있어서 그런지 그런 꿈조차 꾸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초등학교 일제고사가 실시되면서 어른들의 사고방식으로 아이들을 평가하고 더욱더 아이들을 꿈 꿀 수 없는 현실로 내모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단식에 대해 질문을 받으시고는 당신한테서 새로운 계약이 실현되고 있음을 밝히십니다. 예수님한테서 시작되는 새로운 하느님의 법은 마치 새 포도주처럼 힘이 있습니다.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난 헌 가죽부대로는 계속 성장하며 발효되어 점점 부풀어 오르는 새 포도주의 역동성을 담을 수 없으므로, 그 힘을 담을 새 그릇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계약은 제자들과 함께 성장하고 익어갈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한테도 어른들의 낡은 기준이 아니라 그들을 잘 키우고 성장시킬 수 있는 예수님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현실을 걱정하고 힘겨워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꿈을 꾸고 힘차게 성장할 수 있는 새 포도주 같은 힘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신 인기가요     

-김광태-

 

얼마 전 아주 재미있는 책을 찾았습니다. <최신 인기가요 500곡>.
표지가 비교적 깨끗해서 언제 적 책인가 봤더니 벌써 15년 이상 지난
것이었습니다. 아는 노래가 많아서 정겨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신자들의 성화에 떠밀려 부르게 되는 노래란 다 이 시기의 것들입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저의‘최신 인기가요’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50대 후반에서 70대 신자들과
주로 어울리다 보니 아직 버틸 만합니다. 하지만 가끔 젊은 유학생들과
어울리다 보면 금방 들통이 납니다. “역시 신부님은 클래식하셔!” 그래서
요즘엔 청년들보다는 연세 드신 분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편합니다.
처음부터 “새 포도주”가 아니었던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시대에
가장 잘 나가던 최신 인기가요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2천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Good News”
즉 “새로운 소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인간성이
점점 낡아가면서 하느님의 참신하심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최신 인기가요’를 이제 그만 불러야 합니다.

  

 

사람을 바꾸라"가 아니라 "사람이 바뀌라"

-김찬선신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아주 멋진 말입니다.

얼마 전, 저는 새로운 책임자에게 프란치스코 영성학교 강의를
그만 두겠다는 뜻을 전하였습니다.
매주 강의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전부터 제가 영성학교에서 강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영성이나 글라라 영성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공하지 않았지만 전공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전공하지 않았지만 제가 강의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학문적인 강의는 제가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주장을 하지 객관적인 주장은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정 강의는 할 수 있어도
학문적인 강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만 두겠다고 한 더 큰 이유는
영성학교 책임자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새로운 책임자에 대한 안 좋은 감정 때문은 아닙니다.
새로운 책임자가 새로운 학교를 만들고
새로운 강의와 학사 계획을 짜는데 있어 제가 부담되지 않기 위해서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처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에는
새로운 제도와 조직에는 물갈이가 필요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는
이처럼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물갈이하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새 부대는
기존의 부대를 대체하는 다른 부대가 아니라
새로워진 부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라!’가 아니라 ‘사람이 바뀌라!’는 얘기지요.
포도주는 새로워졌으니 부대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무엇이 새 포도주입니까?

제 생각에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전과 다른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
복음에서 주님은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전에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제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요약하면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러니 율법에 맞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이제는 사랑에 맞는 사랑 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법의 잣대로 판단하고 단죄하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정신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안고 가는 것입니다.
법의 잣대로 사람을 갈아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정신으로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내 법의 잣대로 사람을 재고
내 법의 잣대에 맞는 사람이기를 요구하고
요구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을 갈아치려 합니다.
그는 저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데
저는 저의 잣대를 그에게 들이댑니다.
“잘못이 아니라 고통을”을 경구삼아
새 해를 시작한지 보름이 지났지만
그래서 아침마다 이 경구를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새 해가 되었다고 새 부대가 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전삼용신부-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한 신부님을 압니다. 그 신부님이 아시는 다른 신부님을 만나려 함께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사를 함께 드렸는데 성작과 성합이 매우 아름답고 값어치 있게 보였습니다. 저와 함께 간 그 신부님은 미사 도중에도 그 아름다운 성작의 문양을 손으로 만져보는 등 그 화려함에 경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그 신부님은 저에게 “오늘 좋았지? 근데 내가 오늘 그 신부에게 사는 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충고를 해 주었어.”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그 신부님을 존경하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각자 삶의 방식이 있으니 당신이 가난하게 사신다고 남에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성인들이 다 가난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그럼 부자가 성인이 되나?”라고 되묻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님들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성인 교황님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은 가난하게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분들이셨잖아요.”

그 신부님은 더 이상 저에게 말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다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부자라고 다 죄인인 것도 아닙니다. 내면적으로는 행려자가 더 부자일수 있고 재벌이 더 가난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전 어떤 신학생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충격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우리의 심리를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따르면, 위의 제가 아는 신부님은 겉으로는 가난하게 살지만 사실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부자로 사는 동료 사제에 대해 화가 났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억지로 짓누르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 곧 나의 감추어진 모습을 비판하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단식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단식과 기도’를 자주 함께 사용함으로써 단식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강요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혼인잔치에서 단식하는 일은 오히려 잔치에 초대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초대받았을 땐 왕창 먹어줘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신랑이고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음을 일깨워주십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적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길들이 있듯이 누구나 다 각자의 길로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완덕으로 향하는데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이라도 적재적소에 올바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말씀하시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내가 따르고 있는 것들이 항상 상대방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헌옷은 헌옷 조각으로 새 옷은 새 옷 조각으로 기워야 옷이 상하지 않습니다. 술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발효하여 터지고 맙니다.

 

병원에 입원해 계신 어떤 분을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간수치가 너무 높아서 수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수치는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약을 먹으면 몸에 좋을 것 같아서 병원에서 몰래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약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다른 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을 높이는 신앙인으로 살자
-
경규봉 신부-


왕이 된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주변의 여러 종족들과 여러 차례 전투를 할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사울은 전투에 대한 노하우도 풍부히 갖추었고, 조직된 군사들을 거느렸으며, 왕으로서 지녀야 할 여러 가지 자격을 갖춤으로써 그의 왕위를 굳건히 하였다. 이제 감히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누구도 사울을 넘볼 수 없는 왕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울에게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 족을 공격하여 그들과 그 재산을 모조리 없애라고 말씀하셨다. 사울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아말렉 족을 공격하여 그들을 모조리 없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승전비를 세우고, 아말렉 족의 왕과 죽이기가 아까운 탐스러운 가축들은 노획물로 잡아왔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무엘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하며, 왕에서 파면되리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사울은 “본래 자신을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1사무 15,17)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왕이 되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자, 자신감이 넘치게 되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왕이 되고 전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승전비를 세우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탐스런 가축들을 노획물로 가져온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따르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더욱이 예언자 사무엘이 그의 잘못을 지적하자, 회개하기보다 자신을 변명한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분을 거역하는 것은 점쟁이 노릇만큼이나 죄가 되고 그분께 대드는 것은 우상을 위하는 것만큼이나 죄가 되오.”(1사무 15,23)라고 말한다. 사울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대드는 죄를 지은 것이다.

사울과 다윗은 둘 다 왕이었고,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의 차이점은 이렇다. 사울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지만, 다윗은 자신을 낮추고“야훼 나의 주님, 제가 무엇이며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저를 이런 자리에까지 끌어 올려 주셨습니까?”(2사무 7,18)라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알고 감사드렸다.

예언자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했을 때, 사울은 자신을 변명했지만, 다윗은 곧바로 무릎을 꿇고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라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바로 그 차이점 때문에 사울은 죽음을 당했고, 다윗은 성왕으로 칭송받았다.

옛말에 “잘못되면 조상 탓이고, 잘되면 자신의 공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시절에는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빌지만, 자신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점점 커지게 되면 모든 일이 자신의 공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이 성공을 하게 되면 자신감을 갖게 되고, 나아가 자만심, 교만심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모든 일을 자신의 생각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죄를 짓는 자신을 변명하고 하느님께 대드는 죄를 범한다.

모든 일들이 순조롭고 잘되어갈 때,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고 감사드리는 신앙인, 자신의 생각과 판단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자신의 잘못과 죄를 변명하기보다, 하느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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