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2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마르3,1-6)
Jesus said to the man with the paralyzed hand,
"Stand here in the center." Then he asked them,
"What does the Law allow us to do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harm? To save life or to kill?"
But they were silent.
Then Jesus looked around at them
with anger and deep sadness
because they had closed their minds.
And he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healed.
말씀의 초대
사울을 섬기게 된 소년 다윗은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군과 사울을 위해, 사울의 만류에도 필리스티아 전사 골리앗과 단신으로 맞선다. 다윗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골리앗을 쳐 이겨 이스라엘군이 승전한다(제1독서). 사람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기시는지 완고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슬퍼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를 찬찬히 묵상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참뜻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두 낱말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먼저 다른 이에게 내밀지도, 내민 손을 잡을 수도 없는 ‘오그라든 손’에서 우리는 깊이 상처 입은 내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상처와 약점을 드러내지 못하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일 것이고, 거듭된 거절에서 느낀 분노와 절망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다른 이에게 다가서지도 신뢰하지도 못하는 처지일 것입니다. 또한 삶의 의미가 있음을 매 순간 느끼며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믿지 못하는 가운데 일상의 고단함에 지쳐 체념해 버린 생기 잃은 마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그라든 손을 뻗어라.’ 하시며 병자를 치유하시듯이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을 여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더 이상 두려움과 체념이 아니라 단순한 마음으로 손바닥을 펼쳐 이웃에게 다가서고 그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더 비참한 것은 예수님께서도 어찌하지 못하셨던 ‘완고한 마음’입니다. 이웃의 불행에 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집요하게 예수님의 ‘범법’을 찾고자 했던 그 얼어붙은 마음입니다. 그 굳어 버린 마음은 스스로의 비참함을 보지 않으려는 오만함에서 자라났기에 더욱 가련합니다. 비겁하고 교활하게 군중의 얼굴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에 더욱 무섭습니다. 우리 역시 때때로 군중 속에 자신을 숨긴 채 완고한 마음으로 서 있곤 합니다. 그 비참함을 깨닫고 슬퍼하는 것이 또한 구원 체험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음 게임에서 이기면 모든 선수와 코치에게 포드 승용차를 한 대씩 사주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선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록 다음 게임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포드 승용차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아주 맹렬히 연습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 되었습니다. 선수들은 이번만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경기장에 들어섰습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결국 38대 0이라는 점수로 대패하고 말았답니다. 포드 승용차라는 커다란 상이 있었지만, 일주일간의 준비만으로는 그 상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즉, 아무런 준비 없이 들뜬 열정만으로는 승리를 얻을 수 없음을 보여준 예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목표 의식을 갖고 시간을 두고 철저히 준비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면 된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어떠한 목표에 대해 철저한 준비를 통해서 이룬 것과 순간적인 열정만으로 이룬 것은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아주 큰 열정을 가지고 있는 바리사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에 대한 열정은 아주 대단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율법 조항들을 다시 세분하여 613개의 항목을 만들기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율법의 준수라는 열정만을 가지고 있었지요. 율법의 본 뜻이 무엇인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는지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정만으로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안식일에는 좋은 일을 하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철저히 사랑을 실천할 때에만 율법의 본 뜻을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열정은 급하게 식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고 그렇게 열심히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냉담자가 되어 교회를 비판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철저히 준비하면서 주님의 뜻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철저히 준비되어 있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벗어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그 준비사항들을 점검해보세요.
고집의 뿌리
-전삼용신부-
이솝의 작품 중에 “나귀의 고집”이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집이 무척 센 나귀를 묵고 산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이 나귀가 곧은길에서 벗어나 낭떠러지 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안심하고 느긋하게 뒤따르던 나귀 주인은 순간 큰일 났다 싶어서 얼른 나귀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나귀를 끌어올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귀는 도로 올라오려고 하지 않고 자꾸만 낭떠러지 쪽으로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한참 동안 당기기거나 빼내려는 씨름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잡고 있던 꼬리를 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까지 딸려 내려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고집불통인 나귀죠? 그러나 저도 어렸을 때 나귀와 같았던 적이 기억납니다.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누군가의 잘못으로 넘어지게 되었고 머리를 땅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아파 죽겠는데 친구라는 녀석들이 웃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분하고 아파서 마구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놀라서 저를 마루에 누이고 빙 둘러서서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잘 됐다싶어 더 크게 울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 머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어섰다가는 엄살 부렸다고 창피를 당할까봐 계속 울었습니다. 함께 놀던 제 친형을 비롯한 친구들은 저를 달래는 것도 지쳤는지 울고 있는 저를 혼자 두고 다들 다시 놀러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울음을 그치고 앉아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울보가 되어버린 저를 한탄하였습니다.
결국 사람이 고집불통이 되게 하는 것은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중세기의 전쟁이야기 가운데, 유명한 로랑 장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랑은 프랑스의 황제 [샤를 마뉴] 대제의 12용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페인을 점령했던 이슬람교도들인 무어인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로랑이 이끄는 군대가 포위당하고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옛날 전쟁에서 이런 경우에 구원군을 부르기 위하여, 뿔나팔을 대장이 휴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랑은 자기의 체면 때문에 뿔 나팔을 불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부하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고 아주 위급해 졌지마는, 로랑의 고집은 자기 자신이 죽을 순간까지 뿔 나팔을 불지 않고 만 것입니다. 로랑의 체면 유지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를 전멸시키고 말았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단에 빠졌지만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 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분의 한 친구가 이단 종교에 빠져서 많은 재산을 날렸습니다. 나중에 그 분이 많은 것을 잃고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친구에게 아직도 거기서 말하는 것을 정말 그대로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믿었고, 지금은 안 믿어. 근데 이젠 쪽팔려서 못나가.”
자신이 가는 길이 나락을 향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방향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사실은 적지 않게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인간의 이런 완고한 면 때문에 화가 나시고 슬프신 것입니다. 꼬리를 잡고 끌어 올리고 싶지만 끝까지 나락으로 향하는 고집불통인 나귀들이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지 고쳐주시지 않는지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 분을 고발하여 죽이는 것이 그들 목적입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지, 죽이는 것이 옳은지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나쁜 길로 가고 있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 상처를 입히고 그 분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을 주어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지금 와서 돌아설 수도 없습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집단으로부터 버림받는 것도 두렵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무리들 속에 있어야 체면이 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식일이지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잃지 않으려고 당신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까지 잃을 수는 없습니다. 이젠 그들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더욱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고, 친하지도 않던 헤로데 당원들과도 손을 잡고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게 됩니다.
어쩌면 지옥이라는 곳은 이런 나귀와 같은 이들이 가는 곳 같습니다. 즉 본인이 원해서 가는 줄 알면서도 가는 것입니다. 그냥 하느님이 밉고 그 분이 없는 곳으로만 가고 싶어서 스스로 가는 곳입니다. 사람은 이렇게까지 악하게 되어 마귀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완고하여 지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으려는 자존심이나 체면 차리는 것부터 없애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 ‘고통과 멸시’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낮아지는 것을 즐깁시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모세의 많은 기적을 보면서도 왕의 자리에 있었기에 끝까지 고집을 부렸고 그래서 맏아들도 죽고 많은 것을 잃게 되었던 것처럼, 고집은 체면이나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체면과 자존심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남들에게 멸시 당하고 낮아지는 것을 즐길 줄 알 때, 옳지 않은 길임을 알면서도 고집부리며 그 길로 계속 가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일 지내기
-김수환 신부-
박 과장은 주말이면 늘 친구들과 모여 늦게까지 술을 마십니다. 그래서 새벽에
집에 들어가 주일 아침 내내 자다가 일어나 정신을 차리면 오후입니다. 이런
까닭에 박 과장은 언제나 주일 저녁미사에 참여합니다. 김 씨 부부는 낚시에
취미를 붙이면서 밤낚시를 다니게 되었는데 토요일 특전미사에 참여하고 낚시를 떠나면
다음 날 주일 오후까지 느긋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어 요즘 특전미사에만
나옵니다. 이 씨 아저씨는 아침 7시 미사에만 옵니다. 아침 첫 미사에는 신자들
이 적고 성가대가 따로 없어서 미사가 보통 사십 분이면 끝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도 위와 비슷한 이유로 미사를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당 공동체란 한 가족이기에 주일에 신자 모두가 함께 같은 미사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신자 수, 성당 좌석 수, 신자들의 서로 다른 직업과 생활양식을 고려하여
여러 대의 주일미사가 있습니다. 토요 특전미사 역시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을 지내기 어려운 신자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많은 신자들이
편리에 따라 미사시간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오그라든 손을 펴
주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주일을 지내며 우리의 상처받은
영혼과 육신을 치유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 미사로 의무를 다했다고
여긴다면, 안식일에 보여 주신 예수님의 치유 행위 조차 율법 위반이라며
예수님을 해칠 모의를 시작한 바리사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류해욱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대목입니다. 성 이냐시오는 관상을 하기 위해 늘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려 보라고 합니다.
장면은 회당입니다. 회당 한쪽 구석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고 예수님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는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는지를 지켜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먼저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예수님의 노기 띤 마음을 헤아리십시오. 당신이 하시는 일,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는 일 자체보다 안식일에 일하는 것에 대해 트집을 잡아 고발하여 남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들의 완고한 마음에 대해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그분의 행동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손이 다시 성해졌습니다.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치유 기적을 본 사람들, 바리사이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들은 한 사람의 치유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고 다만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합니다. 우리 삶에서 바리사이들과 같은 행동을 한 적은 없는지 반성하며 예수님의 슬픈 마음에 깊이 머무르십시오.
남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이유
-김찬선신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어제 새벽엔 저희 형제 하나가 수술을 하여 간호를 하였습니다.
조용한 병원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제 밤 갑자기 심근경색이 와서 응급실로 왔는데
주일, 곧 휴일에는 의사들도 쉬어야 헌다고 하며
수술을 해주지 않았으면 우리 형제는 아마 죽었을 겁니다.
남들 다 쉴 때 이렇게 쉬지 않고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의사, 간호사와 그 밖의 봉사자들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준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의사보고 안식일에는 치료하지 말라는 얘기이고,
환자에게는 아파 죽게 되었어도 안식일에는 참으라는 얘기지요.
어떻게 이렇게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강팍한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놀랄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꾸러트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고,
그래서 남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강팍할 수 있었던 겁니다.
노린다는 것은 남이 잘못 되는 것이 목적이고,
그래서 그를 거꾸러트리기 위해 잘못 하는 순간만 기다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당연히 노려보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노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악한 행위에의 집중입니다.
그래서 누가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해도 그것은 보지 못하고
악한 행위만을 봅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거꾸러트릴 수 있는 기회를 노렸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온통 죄악에 집중되어 있는 이들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악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엔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직된 그들에게
선행도 하지 말아야 하느냐고 물은 다음,
선을 악으로 왜곡하는 그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행이냐 악행이냐를 묻는 겁니다.
선을 왜곡하는 그들 마음의 정곡을 찌르는 겁니다.
그러면서 남의 잘못만을 보지 말고
너희 마음이 얼마나 사악한지 보라는 것이고,
너희 마음이 얼마나 악으로 가득한지도 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사악하여
선은 보지 못하고 악만 보고,
선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만 채집하며,
선마저 악으로 몰아가는 그 왜곡된 자신을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 안의 악한 마음이 밖의 악만을 골라서 보게 하고,
보는 대로 내 안이 악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쓰레기를 보면
밖에 있는 그 쓰레기가 고스란히 내 안으로 들어오지요?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 유시찬 신부-
잘 알다시피 안식일을 둘러싼 논쟁은 복음서 도처에서 보입니다. 오늘 복음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놓고,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회중과의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같은 친숙한 장면을 대할 때는 오히려 조심했으면 합니다. 형식에 사로잡힌 바리사이들의 태도는 잘못되었고, 생명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좋은 분이라는 식으로 간단히 정리해 버리고, 그에 비춰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나 하면서 끝내면 기도가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도 자유롭게 영을 풀어놓는 가운데 관상에 임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해지겠지요.
먼저 회당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살펴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와 있는지, 예수님은 어디쯤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지, 바리사이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이런 모든 것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와 기운들도 어떤지를 더듬어 보세요.
그러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어떻게 고쳐주시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의 표정·말씀·몸짓을 살펴보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표정과 태도도 보고, 주위 사람들의 모습도 살펴보십시오.
이때 한 장면은 예수님께서 노기를 띠고 그들을 둘러보셨다는 내용인데요, 사실 다른 공관복음에는 이런 내용이 탈락되고 없습니다. 예수님은 화 같은 것은 내지 않는 분이라는, 다소 고지식한 전통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겐 약간의 걸림돌이 될지 모르지만, 사실 이런 부분이 실마리가 되어 중요한 것을 낚아챌 수 있을지도 모르죠.
<구원을 위한 세 가지 당부>
-양승국신부-
언젠가 운동하다가 오른팔을 다쳐 한 달 정도 깁스를 하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정말 불편하더군요. 여름에 그랬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깁스한 부위가 가려울 때 정말 미칠 뻔 했습니다. 너무 가려운 나머지 드릴로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막대기를 넣어 긁기도 했습니다.
불편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쓰는 것, 밥 먹는 것, 물건 드는 것... 등등. 또 한 가지 불편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반가움의 표시로 많은 분들이 악수를 청합니다. 깁스를 하게 되니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불편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겪은 여러 불편 가운데 가장 큰 불편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 육체적 불편은 그나마 견딜만했을 것입니다. 가장 큰 불편은 정신적, 심리적 불편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손이 오그라듦으로 인해 그는 다양한 소외감을 겪었을 것입니다. 우선 오그라든 손이 눈에 띄니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시선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함께 놀이할 때나 일할 때나 그 어떤 것을 할 때도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늘 제약을 받아왔고,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열등감, 소외감, 우울함, 고독감에 사로잡혀 힘겹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받지 못했던 큰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해 듣습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일어나라: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한 평생 의기소침해서 제대로 한번 당당하게 일어서보지 못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제 훌훌 털고, 안심하고, 나를 믿고 일어서라고 초대하십니다.
오늘도 죄와 병고와 상처로 인해 일어나 앉아있을 힘조차 없어 드러누워만 있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일어나라!”
가운데로 나와라: 그는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한평생 주변인으로 살아왔습니다. 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이 세상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몰아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데, 스스로를 자학하며 괴롭히며 왕따로 만든 그에게 가운데로 나오라고 당부하십니다.
오늘도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스스로를 철저하게도 삶의 외곽으로 밀쳐내며,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너는 네 인생의 주인공이니 당당하게 이 세상의 중심으로 나오라는 의미로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인생마저 왜곡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손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포함해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손을 뻗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용서하지 못하는 꽁한 마음, 그 누군가가 던진 상처로 인해 굳어진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이제 원래 하느님께서 주신 첫 마음을 회복하라, 보다 자유로워져서 자비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라, 평화롭게 살아가라는 당부로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손을 뻗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