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코 1,21ㄴ-28)
Jesus rebuked him and said,
“Quiet! Come out of him!”
The unclean spirit convulsed him
and with a loud cry came out of him.
말씀의 초대
한나는 엘카나의 아내이다. 엘카나의 다른 아내 프닌나는 한나에 대해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비웃었고, 한나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며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다. 그들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실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가슴 찢어지는 아픈 심정으로 하느님께 호소하는 이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마음의 가난이 무엇인지를 그저 비유나 논리적인 사고로서가 아니라 절실한 삶 속에서 보게 됩니다. 오늘과 내일의 독서에서 만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 좋은 보기입니다.
사무엘기 상권에서는 시작부터 한나의 한스러운 처지를 생생하게 알려 줍니다. 그 쓰라리고 원통한 마음을 그녀는 억지로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달려가 한없이 흐느끼는 가운데 기도하며 자비를 청합니다(내일 독서 참조). “하느님, 제 권리를 되찾아 주소서. 충실치 못한 백성을 거슬러 제 소송을 이끌어 주소서. 거짓되고 불의한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시편 43〔42〕,1). 우리가 자주 듣는 이 애원처럼, 하느님께만 마지막 희망을 둘 수 있는 절박함을 이 여인은 잘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면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사람 낚는 어부’의 덕목이 무엇일지 묵상해 봅니다. 한나처럼 모든 것을 내놓은 채 하느님께 호소해야 할 정도로 처절하고 가난한 이의 마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굴곡과 서러움의 마디마디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그 상처와 한을 두려움 없이 하느님 앞에서 고스란히 호소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 주님의 제자로서 사람을 대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해방과 자유로 초대하시는 분
-구요비 신부-
신학생 시절, 방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오면 동창생들이 함께 모여 방학생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 번은 시골 본당 출신 친구가 겨울방학 동안에 마귀 들린 여자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본당에 마귀 들린 여자가 있어서 많은 교우들이 기도해 주려고 갔는데 이 여인이 메가톤급 신자들의 비리를 폭로해 모두를 혼비백산시키고 본당은 초상집과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마침 그 시기에 동창생이 방학을 지내러 내려가니 신자들은 크게 반기며 “우리 학사님이야 순결한 분이시니 마귀 들린 여자를 대적할 수 있겠지!” 하더란다. 다음날 신자들과 함께 그 여인의 집을 방문했다. 신자들이 여인에게 신학생이라고 소개한 후 함께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동안 내내 이 마귀 들린 여인이 뚫어지게 자신의 눈을 쳐다보며 무슨 비리를 찾는 것 같아 두려운 나머지 시선을 피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기억에도 희미한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어쩌면 그 여인이 마귀에 사로잡힌 부마자였다기보다는 인간적인 상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던 가련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세상 안에는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는 하느님의 빛과 은총이 역사하시는 반면에 이에 저항하는 어둠과 악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주신다.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6절). 예수님 가르침의 권위는(22절), 그분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심을 단지 말로만 선포하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곧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악의 세력과 싸우기까지 하심에서 나온다. 예수님은 단지 인간의 신체적 병만을 치료해 주시지 않고 인간의 근원적 병인 죄까지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사로잡고 있는 악령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해 주시는 구마자이시다.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다워
- 이찬홍 신부
강론시간이 가요 톱 텐이나, 뮤직뱅크 시간이 아니데, 요즘 들어 가요를 자주 인용하게 됩니다. 안치환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람의 꽃보다 아름다워”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 누가 뭐래도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 누가 뭐래도 ―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하아 햐
노랫말을 천천히 음미해 봅니다. 그런데,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 꽃이 사람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장미, 백합, 극락조, 초라한 잡초라 하더라도, 그 꽃이 저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 노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 소중함에 대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초라하게 보여도…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으로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고귀한 존재요,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귀함, 가치를 따진다면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사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사람의 우월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만이 최고요, 중심이기에 자연과 다른 창조물들을 훼손하고 파괴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최고’란 의미는 지배 피지배의 개념이 아니라, 소중함의 의미입니다. 신앙인이든, 비 신앙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모두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요, 하느님의 숨결, 넋으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자 외칩니다. “나자렛 예수님,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떠나거라.” 꾸짖으시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에, 치유해 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묵상하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이 외침이 마음에 남습니다.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과 더러운 영, 곧 마귀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모상을 갖고 있고, 예수님의 숨결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관이 있습니다.
비록, 몸과 마음이 온전치 못하여 스스로 괴로움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는 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도 예수님에게는 소중한 존재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에도 예수님께는 그러한 존재이기에… 구원의 대상이기에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으로 나약하고, 많은 잘못과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자신과 이웃들에게 실망과 아픔을 안겨준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아름다운 꽃으로 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또한 시편 저자처럼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인간을)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나이다.”
이러한 감사와 찬양과 함께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꽃보다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다짐을 드리며 새롭게 시작되는 연중 시기를 기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기도하지 않으면
- 김광태-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쏠려 있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예수님께서는 집이 없으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너무도 다급했기에 잠자리조차 제대로
챙길 여유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과 엇박자를
일으키는 일이 여기에서도 엿보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놀라운 치유를 체험했으니 감사하는
마음에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을 것이고,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는
말씀을 들려주는 그분 곁에 머물면서 오래오래 그 좋은 말씀을 듣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사람들의 그런 반응을 전해주러 예수님을 찾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여행이 너무 힘드니 좀 쉬었다 갑시다.’ ‘사람들의 호의를 너무 거절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뭐 이런 게 아닐까요? 복음의 문맥을 보면
원인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 일찍부터 외딴곳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제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몰려드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에 단잠을 깨자마자
예수님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일어나자마자 일단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합시다. 그래야 허둥대며 세속적인 관심사에 휩쓸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먼저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늘의 권위
-전삼용신부-
고대 그리이스의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정복하였을 때입니다. 그는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를 보며 그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곳에 내 이름을 딴 도시를 하나 건설하여라.”
그렇게 해서 건설되었던 도시가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후에도 로마,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함께 가장 위대하고 문화적으로도 강력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말의 위력이 바로 이것입니다. ‘권위가 있는 말’은 그 말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감탄한 이들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는 달리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저 말이 내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서만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납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압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음을 압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랬더니 기리기리 날뛰던 마귀는 그 사람에게서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갑니다.
이것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놀랍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면 마귀도 저항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말씀에 그런 권위를 지니시게 된 것일까요? 말씀에 권위를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 말씀에도 하느님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는 그 행실로 드러납니다.
제가 어떤 신학생이 너무 게으른 것 같아서 좀 부지런해지라고 한 마디 하였습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하루에 6시간도 안자는 사람이 많다. 너는 사제가 될 사람인데 그렇게 무질서하게 산다면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니?”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산다는 것을 알까요? 강론 대에서 좋은 말만 해 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럼 네 삶과 반대되게 가르치겠다는 거야?”
“올바른 가르침만 주면 되죠.”
물론 저의 간섭이 싫어서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강론 대에서 위선적으로라도 감동적인 강론을 해 주면 신자들의 삶이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변화시킬 수 없는 말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있을까요? 자기 자신이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 말에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기적이 일어나게 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학자들과 달랐던 점은 그 분은 먼저 다른 이들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당신 자신이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말은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들이 매일 싸우면서 자녀들에게는 우애 있게 지내라고 하고, 당신들은 텔레비전만 보며 아이들에게는 공부를 왜 안 하냐고 호통을 친다면 그런 말은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권위는 ‘성령’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어느 정도 충만해 있느냐에 따라 그 말과 행동에 권위가 드러납니다. 세상이 주는 학위나 세상적인 명예로는 율법학자들과 같은 위선적 권위만을 내세울 수밖에 없고 어떤 때는 자신들이 존경받기 위해서 매우 ‘권위적’으로 변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존경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말씀과, 마더 데레사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과, 우리 보통 사람이 말하는 것과 또 미움 가득 찬 삶을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말해주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 충만한 삶으로 모범을 보이신 분의 말만이 권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이 권위가 있어지기 위해서는 좋은 화법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을 산다면 한 마디만 해도 커다란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우선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말하기 전에 그 말이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킬 수 있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 되게 해야겠습니다.
고유한 속도에 맞추어
- 조정희 수녀-
얼마 전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교육분과 연수가 있었다. 거기서 ‘핀란드 학교교육’에 대한 취재 내용을 보았다. 맨 먼저 내 마음에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핀란드의 교육 목표였다. ‘학교교육에서 뒤떨어지는 학생이 없게 하는 것’이 국가 수준의 교육 목표였다. 그에 따라 국민들의 경제·문화적 차이에도 고른 교육 기회를 통해 대학교까지 무상 교육이 이루어졌다.
교실 안에서도 전체적인 수업을 하는 선생님과 함께 속도가 느린 학생에게 맞추어 지도하는 다른 선생님이 계셨다. 그래서 학생 개인의 수준에 맞게 배우고 다음 단계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렇지 못한 우리 학교 현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그 결과 국제 교육 성취도 평가에서 핀란드 학생들은 고르게 일정 수준 이상의 학업 성취를 보이며 전체적으로도 우수한 성적을 드러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편차가 심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행복하게 배우며 가르치는 핀란드의 학교가 내게는 참으로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의 현장으로 느껴졌다. 비교에 의해 속도가 빠르고 느리다고 하기보다 각자의 고유한 속도가 존중되고 받아들여지는 교육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위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획일적인 잣대로 줄 세우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며 모두를 살리시는 데서 우리의 온 존재에 감동을 주는 권위를 지니신 참 스승님, 이제 그 뒤를 따르는 우리가 한 걸음씩 작지만 귀한 걸음을 내디딜 때다.
악마의 기도
-이중섭 신부-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첫 제자 네 명을 부르신 다음에 하신 첫 번째 행동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자기과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표징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정체를 분명히 알았기에 그분을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마르 1,24).
사람들은 아직까지 예수님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데, 악마는 그것을 벌써 알고신앙고백까지 한 것입니다. 악마의 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그저 하늘에 계십시오. 그 대신 제 이름이
거룩히 빛나며, 제 나라가 임하며, 제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것이 악마의 기도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도 실제로는 악마의 기도를 바치며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회개란 악마의 기도에서 주님의 기도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신앙고백까지 하더라도 참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악마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연중 제1주간 화요일
- 방삼민 신부-
어느 풋내기 변호사가 사무실을 열게 되었다. 개업 첫날이었다. 손님이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옳지, 이제야 손님이 오는구나. 첫손님이니 내가 꼭 사건을 맡아야지.’ 이렇게 생각한 변호사는 어떻게든 손님에게 신뢰감을 줄 양으로 개통도 되지 않은 수화기를 잡아들었다. 그리고는 뭐라고 애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일감을 맡고 있는지를 손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손님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온갖 제스처를 다 써가며 더 큰 소리로 지껄였다, “사실 맡은 사건이 많아 요즘 제가 무척 바쁩니다. 오늘 아침에도 손해배상소송사건을 의뢰해온 분이 계신데 일이 밀려 제가 거절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일은 어떻게든 짬을 내어 제가 맡아 드리겠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그럼, 다른 손님이 오셔서 이만 전화를 끊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변호사는 손님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손님은 무슨 사건으로 오셨죠?” 그러자 손님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저... 사실은 전화국에서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신청하신 전화선을 이어 드릴려구요.” 전공은 아직 개통하지 않은 전화기의 선을 찾아 잇기 시작했다. 방금 그 변호사가 들고 지껄였던 전화기였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사람은 허세를 부려서라도 자신의 능력을 드려내고 자랑하려고합니다. 말하자면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특히 요즘 같은 상업화된 사회일수록 과장된 홍보와 말들이 넘쳐납니다. 홈쇼핑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말들을 잘 하는지 금방이라도 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게끔 만듭니다. 또 각종 홍보물은 어떻습니까? 매일 같이 쏟아지는 전단지, 각종잡지, 인쇄물들이 넘쳐나 제 같은 경우엔 책상이 어지러운 건 물론이고 봉투째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도 허다합니다. 무슨 하고 싶은 말들이 그리 많은지요.
저 역시 매일미사 강론을 합니다만 어떤 때는 잘 준비되지도 못한 강론을 하면서 마음에 와 닿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말을 하고 살면서 정작 자신의 삶은 그렇지 못함을 생각할 때 그 강론의 말씀이 얼마나 힘이 없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역시 말의 힘은 행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나 “아직도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 이유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누지 않아서 입니다.”라고 했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 등, 유명인사나 위인의 금언을 들을 때 가끔은 “나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는데”하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지요? 그렇다면 누구나 깊이 생각하면 할 수 있는 말이 오늘날까지 “누구, 누구의 금언”으로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멋진 말을 남겨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말을 평생 삶으로 살아 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그 가르침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어서 악령까지 굴복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예지의 능력이 있는 악령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고 발작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초월적인 모습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더 두드러집니다. 악령 들린 사람을 해방시켜 주시는 모습에서부터 비롯하여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는 등 수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는 광경은 예수께서 얼마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신가를 여실히 보여주시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지도자와 억박 지르고 허세 부리는 지도자를 금방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허세와 권위주의에 찬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당신의 삶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빈말이나 겉치레가 아닌 진실된 삶의 자세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